‘개천에서 용’ 난다는 민속은 1950년대 우리나라 농촌에서 일어난 농지개혁으로 생겨난 믿기 어려운 일들을 상징적으로 지어낸 속담이다. 구조적 가난으로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던 농민의 자식들이 농지개혁으로 수확한 곡식을 모두 갖게되자 자식들이 학교에 가서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식들은 농촌과 부모님의 어렵고 슬픈 처지를 잊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큰 도시 대학까지 가는 사람도 생겼다.그들 가운데는 교사, 공무원, 고등고시 합격자들도 더러 나왔다. 이들은 도덕성과 정직성, 부지런함과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는 매우 훌륭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옛 민속에서 생긴 속담인데, 그 의미가 더욱 절절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은 1950년대와 그 뒤 20여 년 동안에 생긴 농촌사회의 구조적 변화에서였다.그 변화란 1950년에 단행된 농지개혁법의 좋은 영향으로, 비록 작지만 집에 농토를 갖게 된 농민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키운 자식들이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자라난 긍지와 보람을 의미한다. 옛부터 우리나라 농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토지를 가질 수 없었다.모든 땅은 임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39년을 기준으로 해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76
우리나라 농사와 농촌 역사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든 농민이 잘사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듯한 정치 제도가 저지른 비인간적 폭력적 증거들이다.이런 정치 제도는 주자학이라 부르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왔다. '천경지의(天經地義·하늘이 바른 길을 얻고, 땅이 적절 함을 얻는 길이라는 뜻. 정당하고 변할 수 없는 도리를 이르는 말)',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선비, 농부, 장인, 상인 네 가지 신분) 계급 제도는 하늘이 낸 것이어서,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사(士)는 곧 양반 사대부를 근간으로 한 귀족과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지닌 뜻을 차츰 알아가는 6월 초순이다. 봄꽃 필 무렵에 덮친 추위가 과일나무 꽃을 유린하며 능금·배·복숭아 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고, 늦봄 무렵부터 옮겨 심은 고추·오이 같은 채소류들이 아침저녁 냉기를 입어서 시들고, 농부들은 병충해인 줄 알아 농약을 뿌렸지만 효과가 없자 뒤늦게야 자연재해인 줄 알면서 불안해한다.밤낮의 기온이나 햇볕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느낌이다. 바닷물의 수위도 조금씩 높아진다는 소문 아닌 뉴스가 끊임없이 퍼진다. 우리 집 뜰에 자라는 산수국이 피고 있는데, 어쩐지 꽃 색깔이 밝지 못하고 어정
공단지대 변두리에 사글세 쪽방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가수 오기택이 부른 '고향무정'이었다.'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1965년을 앞뒤로 농촌 젊은이들이 도시 공단지역으로 일확천금을 노려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고향의 부모 형제들이 더는 배곯지도, 가진 자들에게 업신여김당하지도 않게 하겠다는 피맺힌 맹세를 다짐하면서 떠난 지 60년이 되는 20
우리나라 농사가 비롯된 지는 줄잡아 4000년이 넘는다. 그 농사를 도맡아 한 것이 농투성이 즉 농부다. 그 농사는 하늘 아래 가장 큰 바탕, 농사(자)천하지대본(農事(者)天下之大本)이 되어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수 있었다. 곰네님의 아드님이신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고조선 때부터였다. 조선왕조가 왜놈 총칼로 무너지고 빼앗긴 1910년까지 참으로 오래도록 우리나라 역사의 젖줄이었고, 겨레붙이들의 목숨을 향기롭게 이어 내리게 한 하늘의 은총으로 지은 농사였다.왜놈들한테 빼앗긴 들녘에서도 곡식들은 변함없이 자랐고, 농부들이 온몸으로 지은
농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일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또 끝나지 않을 거룩한 일이다.땅은 하늘과 마주보면서 하늘의 일을 그대로 내려받아 똑같이 이루어내는 기적이기도 하다. 하도 놀랍고, 기쁘고, 고맙고 그지없는 일이다 보니, 고대 중국철학사에는 의 철학에서 '하늘(천)'은 수컷이자 남성을 상징하는 '양(陽)', '땅(地)'은 암컷이자 여성을 상징하는 '음(陰)'으로 표현했다.또한 의 철학에서는 농사를 도맡은 인간의 영역인 땅이, 우주적 영역인 하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농사짓는 인간의 활동이 우주 자연이라는 더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새 생명 한 점 점지해주시길 소망하는 어머니는 물 위에다 기도문을 쓰신다. 이 세상 어떤 글자도 아니고, 빛이나 소리 또는 향기나 맛으로 적은 것도 아니다.오직 흰 그릇에 담긴 맑고 차가운 물이다. 어머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시는 그냥 까막눈이시다.그런데도 글자 따위로는 다할 수 없는 어머니 마음을 고스란히 다 전할 수 있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셨다. 마음은 본디 제 스스로 마음이라 할 수가 없어서, 한 물건에 의지하여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심불자심 인색고유심(心不自心 因色故有心)이라는 참선 수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맺으리." 이호우 선생의 '살구꽃 핀 마을'이다.지난 시절 농촌 웬만한 집엔 크든 작든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위에는 흰 정화수 그릇 얹혀 있지 않은 집이 별로 없었다. '살구꽃 핀 마을'이었다. 첫새벽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정화수 그릇에 담아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새 목숨 내려주시기를 비는 할머니, 어머니 모습은 그 시절을 상징하는 '살구꽃 피는 마을'이었다.농사에는 많은 일손이 든다. 그 일손을 하늘의 칠성님께 빌어 구하
농사가 나라의 가장 크고 소중한 살림이던 때가 있었다. 농사는 하늘의 것을 땅에서도 이루어내는 일이고, 농촌은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곳이다. 신과 인간, 인간과 만물 관계의 평등, 모두 함께 사는 신명을 이상이 아닌 현실의 기쁨으로 누리는 삼위일체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과 시대와 사람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다. 산업화 이전 수천 년 동안을 '농사천하지대본(農事(者)天下之大本)'이라 부른 까닭이다.불교, 그리스도교 같은 고등 종교가 생기기 전이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하늘, 산, 물, 바다, 바람도
우리 농사와 농촌문화가 생겨나고 얼개가 짜진 바탕을 모두 중국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런 일이 생긴 것은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왜곡한 일본 학자들과 그들을 도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의도적인 짓이었다.중국 기록인 을 비롯한 몇몇 중국 기록물에 겨우 몇 줄 정도 나와 있는 한국 고대사 내용을 따르면서, 한국 고대사는 오로지 중국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자랑하듯 해왔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문자가 없다 보니 중국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그들에게
농사는 하늘의 것을 땅에서도 이루어내는 일이고, 농촌은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곳이다. 신과 인간, 인간과 만물 관계의 평등, 모두 함께 사는 신명을 이상이 아닌 현실의 기쁨으로 누리는 삼위일체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과 시대와 사람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다. 산업화 이전 수천 년 동안을 "농사천하지대본(農事(者)天下之大本)"이라 부른 까닭이다.지금 우리는 고작 300년 남짓한 산업화의 물질중심주의가 만든 편하고 이익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자본과 권력의 사슬에 짓눌려서 쓰레기나 토해내는 소비자라는 괴물이 되고 있
제11대 정기국회에서 1987년부터 단계적으로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 뒤로 이 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1985년 여름, 서울의 한 계간지에서 '공동체와 지방자치'를 주제로 한 특집을 실었다. 김학준(서울대 정외과 교수), 한상범(동국대 헌법학 교수), 전지용(조선대 사학과 교수), 노경채(고려대 사학과 강사) 그리고 필자도 맨 뒤에 이름을 올렸다. '마을 단위 자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이었다.기존 해 온 마을 단위 지방자치를 해보자는 매우 구체적인 제의였다. 도시 지역은 그 나름의 특징과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
독일 사람 슈펭글러가 쓴 은 역사철학으로 분류된다. 서양의 도시는 농촌이라는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문명이라 했다. 처음엔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성장을 보듯 볼만했으나 나이 들수록 차츰 괴물로 변질되었다. 나중에는 어머니의 살과 뼈, 영혼까지 수탈하여 철근과 콘크리트로 비만해져서는 어머니도 자식도 함께 몰락한다고 썼다. 1930년 이전의 글이다.이런 그의 견해에는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농촌문화에 대한 아널드 토인비의 와 좋은 비교가 되는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도시의 발생과 성장이
농사와 농촌에 관한 이야기를 되는 대로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농사짓는' 것의 철학적 바탕과 문화와 땅 사이에서 비롯된 인류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분명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곳이 농촌이었고, 그 일이 농사였다.이 두 가지 기억은 모두 사람 마음에 남아서 이른바 산업화의 오물찌꺼기로 급변하고 있는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노스탤지어가 되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이 되어가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죽어야 옳지 않겠나 싶어서이기도 하다.'농사짓는' 일은 무엇을, 누가
'망종(芒種)'은 자연의 변화에 때맞춰 농사(農事)하려는 옛사람들 마음의 시간표에 적혀 있는 비밀신호였다. 자연의 변화를 예감하여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옛사람의 우주철학적 발견이기도 했다. 농사는 하늘의 일을 땅에서도 이루어내려는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어 자못 상서롭기도 했다. 농사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끊임없는 관계와 변화로 이루어진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여정이기도 해서, 단순한 육체적 노동과 약간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행위로 규정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했다.그러면서도 농토에서 거두는 수확물이 먹고사는 양식이
구월아지매는 우리 동네로 시집온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그분 이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남편과 자식들 말고 동네 사람은 그저 구월댁, 진두 마느래, 영이 즈그매, 선동이 즈그 할매라 부른다. 남편은 김진두, 딸내미는 김영이, 손자는 김선동이라 부르면서 구월아지매만 구월댁이다. 남편은 85세. 작년 여름부터 치매를 앓아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월댁은 남편의 그 망각의 시간 위에서 지난날을 낱낱이 떠올리며 84세 노년의 봄날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서 울먹이는 날이 많다. 도로 확장으로 집 앞 논이 거의 잘려나가고 귀퉁이
우리 삶은 매우 작고 하찮은 것들로 이뤄진다. 행·불행도 지극히 사소한 것이 그 바탕이다. 그 사소함의 밑바닥에 욕심이 깔렸다. 권력욕구가 채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먼저 욕하고 비방하다가 폭력을 쓴다. 폭력은 전쟁의 씨앗이다. 전쟁은 인간을 증오와 원한으로 내몰고, 증오와 원한은 행복을 빼앗아버린다. 문제는 욕심이다. 인간의 모든 것이 욕심을 어찌할 것인가에 달렸다.신라 때 원효(617~686) 스님과 진표(760년대 활동) 스님이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뒤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 당한 백제와 고구려 생존자들에게 온몸으로 외쳤던
우리 동네 김 씨는 여든한 살이다. 나를 부를 때 '정 생원'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저녁 어둠살이 내릴 때까지 거의 날마다 12시간 넘게 농사일을 한다.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병에 담아와서 마신다. 일하다 허기가 지면 삶은 고구마, 옥수수, 감자를 먹는데 가만 앉아 쉬면서 먹지 않고, 먹으면서 일을 계속한다. 휴식 시간이 따로 없다. 어떤 경우에도 품삯을 주고 일꾼을 구해 쓰지 않고 김 씨 내외가 다 해치운다.김 씨 이름으로 등기된 땅은 논 800평과 콘크리트 주택이 있는 대지 150평이 전부다. 그런데도 올가을 농협에서 사들이는
필순 씨는 술도가를 하던 아버지의 여자밝힘증이 저지른 과오의 설움덩어리였다. 때로는 오물덩이처럼 이리저리 아이고 떠밀려 다니면서 술도가 종년처럼 자랐다. 필순이란 이름은 아비 말에 반드시 복종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18살 되던 해에 남의 집 머슴살이하던 순한 총각한테 시집가서 올해로 66년 함께 산다. 필순 씨는 84세, 남편 김대구 씨는 87세. 필순 씨는 허리가 기역자인데, 보행보조기 없이는 나다니지 못하며 김대구 씨는 무릎과 허리가 탈이 나서 걷지 못해 바깥나들이 때는 전동차가 있어야 한다. 집안에서도 앉아서 움직여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