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수고로움과 마음의 지극함으로
농작물 키워 음식·문화가 되는 경이로움
농사와 농촌에 관한 이야기를 되는 대로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농사짓는' 것의 철학적 바탕과 문화와 땅 사이에서 비롯된 인류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분명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곳이 농촌이었고, 그 일이 농사였다.
이 두 가지 기억은 모두 사람 마음에 남아서 이른바 산업화의 오물찌꺼기로 급변하고 있는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노스탤지어가 되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이 되어가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죽어야 옳지 않겠나 싶어서이기도 하다.
'농사짓는' 일은 무엇을, 누가, 어떻게, 왜 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며 대답이다. 농사(農事)는 씨 맺는 식물, 땅 위에 새끼 치는 짐승,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을 키우고, 불어나게 하여 땅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그 일은 햇빛과 그늘, 비, 바람, 추위, 더위, 밤과 낮에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여서 거룩하다. 그 거룩함은 육신의 고단함과 마음의 가난이 하나로 사람의 생로병사가 된다.
'짓는다' 함은 손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다만 정성으로 무르녹아서 유·무형의 형태로 드러남이다. 마치 성경 <창세기> 1, 2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과 닮아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좋은 끝을 볼 수 없다.
농부가 밭을 만들어 씨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일에는 육신의 수고로움과 마음의 지극함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감자 한 알을 두 쪽으로 내어 흙속에 심어 잘 가꾸면 적어도 30알가량을 얻을 수 있고, 옥수수 한 알을 흙에 심어 잘 키우면 적어도 600알가량을 얻을 수 있으며, 한 알의 볍씨를 못자리판에서 키워 논에 옮겨 심고 정성껏 키우면 1000개가량을 거둘 수 있다 한다. 이것이야말로 경이롭고, 입에서 저절로 천지자연의 섭리를 찬탄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까닭이다. 이것이 '일(事)'이다. 흙속에서 지어내는 거룩함이다.
목수가 나무를 다듬어 좋은 집을 짓듯이, 농부가 뙤약볕, 흙, 물, 온갖 잡초들, 곤충과 벌레들, 바이러스들, 가뭄, 홍수, 태풍과 천재지변을 육신의 고단함과 마음의 정성으로 이겨내면 끝내 농작물들은 된 대로 화답한다. 이것이 정성과 성실이다. 마침내 하늘의 일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온 정성으로 지은 농작물은 수천 년 내림해 온 지혜로 음식이 되고 반듯한 그릇에 담겨 밥상 위에 올라 아름다운 문화가 된다. 문화의 모체다. 어찌 "잘 먹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받지 않으랴!
천지자연에 감사하고, 수고로움과 땀과 눈물과 기다림으로 지켜낸 노동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한 알의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신비를 공경하며, 끊임없는 자연의 '짓는'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되고 농부의 일생을 어찌 제대로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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