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맡겨두고 세상과 격리되는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인터넷 검색이 허용되지만, 사실상 신문과 TV만이 세상과 연결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하는 이 일을 아직은 챗지피티(GPT)가 못 하지만, 언제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유명 대학에서 시험 중 챗지피티를 쓴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되었고, 시험이 전면 무효가 되어 재시험을 치르게 됐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재시험을 치르게 된다면 정직하게 응시한 학생들도 피해를 볼 것입니다. 하지만, 곧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축구를 보게 됐어요? 이 팀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열정적일 수 있나요?”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서일까. 인터뷰 내내 모양만 다른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던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데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까. 어쩌면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1시간 30분 내내 자신이 가진 사랑의 근거를 낱낱이 밝히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럴싸한 이유에만 골몰한 기자가 못 알아차렸을 뿐이다.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 경기를 보려고 왕복 14시간을 달려가는 마음이나 한 달 용돈이 10만 원인
‘개천에서 용’ 난다는 민속은 1950년대 우리나라 농촌에서 일어난 농지개혁으로 생겨난 믿기 어려운 일들을 상징적으로 지어낸 속담이다. 구조적 가난으로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던 농민의 자식들이 농지개혁으로 수확한 곡식을 모두 갖게되자 자식들이 학교에 가서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식들은 농촌과 부모님의 어렵고 슬픈 처지를 잊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큰 도시 대학까지 가는 사람도 생겼다.그들 가운데는 교사, 공무원, 고등고시 합격자들도 더러 나왔다. 이들은 도덕성과 정직성, 부지런함과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는 매우 훌륭한
SK오션플랜트 지분 매각 추진이 이번 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매각 우선협상 시한이 이달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모회사인 SK에코플랜트는 9월 초 디오션컨소시엄을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뒤 본실사와 계약 협상 기한을 10월 말로 정했다가 한 달 연장했다. 이번 주 안에 협상을 다시 연장할지, 매각이 성사될지 혹은 무산될지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SK에코플랜트는 자산 매각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을 지분 매각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지역 산업과 고용·국가 전략산업과 직결된 기업을 사모펀드에 넘기는 결정이 과연 타당
얼마 전 일본 구마모토현변호사회와 국제교류회에 참여해 ‘AI(인공지능)와 변호사 업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행사 후 친목회에서 한 일본 변호사가 말했다. “9년 전 나 선생이 한국의 전자소송 제도를 소개할 때 참 신기했는데, 이제 우리가 전자소송을 도입하니 한국 변호사들은 AI로 한발 더 나가 있네요.” 이어 “한국은 영상재판도 한다죠? 좀 편리한가요?”라고 묻기에, 나는 “영상재판이 편할 때도 있는데, 서울 변호사들이 지방 사건을 더 저렴하게 수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도 도쿄 변
‘여기, 변화를 시도하는 한 작가가 있다. 그는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수채화에서 또 다른 매체로 나아가고자 한다.’16일 자 온라인 기사 ‘수채화 작가의 새 여정’에서 첫 문장(리드)이었다. 기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빠진 문장으로, 짐작하건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온라인 기사의 첫 문단은 ‘창원 연아트오브갤러리는 14일부터 23일까지 기획초대전 을 연다. 권순화 작가의 새 여정을 알리는 자리다’이다.감정이 과하게 들어간 리드였을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인상 깊은 취재였다. 으레 접하는 기삿거리, 반복되는 전
2022년 11월 드디어 인공지능(AI)이 우리 곁으로 왔다. 오픈AI사의 챗지피티(GPT)가 출시된 것이다. 회사의 CEO 샘 올트먼은 AI 발전 단계를 5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는 대화만 가능한 챗봇이고, 마지막 5단계는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는 AGI(범용인공지능)다. 지금은 그 중간 단계로, AI가 개인비서 역할을 하는 AI에이전트 수준까지 와 있다. 그는 앞으로 5년 내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일하는 AI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올해 중국에서 출시된 ‘마누스’라는 멀티 에이전트는 여러 에이전트들이 동시에 협력해서
쌀값이 다시 오르고 있지만 정작 농민들은 생산비도 건지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가격은 올랐다고 하지만 비료·농약·인건비가 몇 년째 뛰면서 남는 몫은 더 줄었다. 윤석열 정부 때 물가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쌀값을 눌러 잡았다. 이후 정권은 바뀌었지만 농민의 생산비 구조나 농촌 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정책에서 좀처럼 고려되지 않는다.소비자는 싼값을 원하고 정부는 안정된 물가를 말한다. 하지만 그 균형을 농민의 희생 위에 얹어둔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농업은 시장 논리만으로 굴러가는 산업이 아니다. 식량과 지역 생태계를 지탱하
‘에디터(Editor)’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편집(編輯)자다. 여러 필요한 것들을 모으고 재구성해서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게임에서 에디터는 주로 프로그램을 말한다. 게임 개발자들이 여러 데이터들을 조정하고 게임에 적용시킬 수 있는 일종의 툴이다. 게임 밸런스를 잡는 데 필수적인 도구다. 예를 들어, 기획자가 처음 플레이어 캐릭터의 공격력을 100으로 잡고, 몬스터의 방어력을 1000으로 잡았다고 하자. 프로그래머는 그대로 코딩을 해서 구현한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해본다. 밸런스가 적절치 않아 수치를 수정해야
‘지방소멸’이란 단어가 점점 익숙해져만 가는 시대다. 모든 사회경제적 요소가 서울에 집중되었음을 가리키는 ‘서울 공화국’이란 단어가 등장한 지도 이미 오래고, 지방은 날이 갈수록 쇠퇴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특히 청년들에게 이 단어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지방 청년들은 지방에 머무르면 좋은 일자리와 보고 즐길 거리를 누리기 어려울뿐더러, 서울 청년들보다 힘겨운 삶을 살 것이란 암시를 공유한다. 지역의 어른들도 인구유출을 걱정하지만, 내 자식은 서울로 가길 바라며 더 좋은 삶을 지역 바깥에서 그리기에 함께한다.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지역
“단풍이 예뻐요. 산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어요. 사진 찍어 기념으로 저장할까요?” 오랜만에 아빠 만나러 온 딸이 먼 산 바라보며 한 말이다. 기쁘게 같이 사진 찍으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요즘 애들 말로 ‘웃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들이다. 여기도 빨갛고, 저기도 빨갛다. 얼핏 보면 붉은 단풍처럼 보이기도 한다. 순간 기후위기 시대를 헤쳐나가야 할 우리 아이들 미래가 걱정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안타깝고 암울하다. 미안한 마음도 든다.예부터 소나무는 우리네 삶에 없어서
뜬금없는 방식으로 만인의 허를 찔렀던 내란이 종식되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넘었다. 이 기간에도 대한민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계속 요동쳤다.내우란 내란 잔당이 끝없이 준동하는 것이고, 외환이란 집요하게 한국을 겨냥한 트럼프의 압박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듯 대내외 환경이 온통 지뢰밭인데도,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에는 ‘민주주의 한국’이 내란을 극복하고 미국과의 관세전쟁에서 오히려 괄목할만한 ‘경제 체력’을 드러냈다며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시각은 정당한 평가일까? 아님 도 넘은 국뽕일까?필름을 124년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경제 성장 둔화와 사회적 충격이 예상된다.”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대’… ‘세대’는 생물학적, 사회학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생물이 태어나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기도 하며, 사람에게는 특정 연령대와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아마도 ‘해방둥이’라는 말이 현대사에서 처음 쓰인 세대 구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해방둥이’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에 태어난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분들은 광복, 한국전쟁,
사람들은 ‘미림’이라 하면 맛술을 떠올리지만, 내게 미림은 삶의 맛이 아니라 웃음과 대화가 흐르던 삶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는 늘 사람들의 온기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미림탕’이 있었다.미림(美林), ‘아름다운 숲’이라는 뜻이지만, 내게 미림은 숲이 아니라 작은 세상 그 자체였다.칠곡면에서 몇천 원을 쥐고 버스를 타면 읍까지 10분 남짓. 그 몇천 원이면 하루가 다 설렜다. 친구들과 물안경을 하나씩 챙겨 미림탕으로 향하던 일요일이었다. 목욕탕 문을 열면 김이 자욱했고, 욕탕 벽에는 “늘 몸도 마음도 깨끗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
갑자기 동장군이 들이닥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드는데 거꾸로 저잣거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모임도 잦고 포차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목청도 더 높아진다. 모두 내년 지자체 선거 때문이다. 내년 6월 도지사와 시장·군수, 기초·광역의원, 경남교육감을 뽑는 민주주의 축제를 앞두고 기대를 품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걱정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뽑은 의원들이 우리 얼굴을 먹칠하는 꼴은 더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내 기억에 과거 선거에서 뽑힌 의원들이 지역을 자랑스럽게 만든 적은 거의 없었다. 거꾸로 정치의
전자오락실에서 목덜미를 잡힌 아들은 사망을 예감했다. 성난 걸음으로 앞장서는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가는 내내 후회했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긴 부끄러움도 약간은 있었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더 멀더라도 어머니가 찾을 수 없는 오락실을 갔어야 했어!’어머니는 몽둥이부터 들었지만 평소와 달리 바로 휘두르지 않았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얘기했다.“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다음에 오락실 가서 잡히면 야구방망이로 백 대다. 약속해.”한 대도 맞지 않고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선택을 피할
각종 의혹이 불거진 산청군농협이 농협중앙회 특별감사를 받고 있다. 뿔 난 지역 주민들은 이번 감사가 사실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고, 농민을 위한 농협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다.산청군농협은 최근 조합장 경업(경쟁 업종에서 하는 일)금지 위반부터 정육코너 유착 의혹, 산불 구호품 사적 사용 의혹 등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제기됐다. 또한, 상임감사 선거를 두고는 사전선거운동 의혹이 일어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이뿐 아니다. 지난해 치러진 이사 선거에서는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조합원 8명이 고발돼 이 중 4명은 벌금
2026년,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해’로 공식 지정됐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의 힘’을 통해 세계 평화를 추구한 김구 선생의 비전이 유네스코의 보편적 가치와 부합했기 때문이라며 유네스코 총회 결정 배경을 밝혔다. 1945년 11월에 만들어진 유네스코 헌장 서문은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어떤 참전국들도 예상치 못한 끔찍한 세계 대전쟁의 폐허를 목도한 직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명구이다.
예산철이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예산안을 짤 때부터 국회와 의회에서 심사를 거쳐 예산을 확정하는 중요한 시기다. 한해 살림이 달린 자치단체는 정부 부처와 국회의원실 문턱이 닳도록 다닌다. 이제 국회 심사 과정에서 깎이거나 빠진 사업비를 살리려고 땀을 빼는 마지막 관문이다.30년이나 됐다는 지방자치 단면이다. 정부 예산에 목을 매야 하고, 한 푼이라도 국비를 더 배정받으려고 애써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구조에서 진정한 자치를 말하기는 어렵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주민들이 뽑지만 권한이나 재정은 여전히 중앙정부 입김이 세다.경남도
매일 시외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20평 남짓한 간이정류소 대합실은 아침마다 북적인다. 승객 대부분은 어르신들이다. 수년간 같은 시간에 시외버스를 타다보니 눈에 익는 얼굴도 많다. 하루이틀 안 보이는 날이면 괜스레 무슨 일이 생기셨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익숙한 풍경은 나에게 안온함으로 다가오지만, 영 불쾌한 풍경도 있다. 정류소 직원 아저씨는 때때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불시에 고성이 터지면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들 어깨는 찰나에 들썩 올라간다.화요일 아침 사건이 일어났다. 버럭 아저씨가 내 등 뒤로 또 누군가에게 언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