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미림’이라 하면 맛술을 떠올리지만, 내게 미림은 삶의 맛이 아니라 웃음과 대화가 흐르던 삶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는 늘 사람들의 온기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미림탕’이 있었다.

미림(美林), ‘아름다운 숲’이라는 뜻이지만, 내게 미림은 숲이 아니라 작은 세상 그 자체였다.

칠곡면에서 몇천 원을 쥐고 버스를 타면 읍까지 10분 남짓. 그 몇천 원이면 하루가 다 설렜다. 친구들과 물안경을 하나씩 챙겨 미림탕으로 향하던 일요일이었다. 목욕탕 문을 열면 김이 자욱했고, 욕탕 벽에는 “늘 몸도 마음도 깨끗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 길목엔 만평오락실이 있었다. 백 원짜리 동전 몇 개에 세상이 걸려 있던 시절, 아이들의 손끝에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의령극장이 있었고 불빛이 새어 나오던 그 입구에서 우리는 영화 대신 사람을 구경했다.

그리고 미림탕 근처 할매떡볶이집에서는 붉은 양념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오락실도, 극장도, 떡볶이집도, 목욕탕도, 모두 읍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었다. 읍은 초등학생이던 내게 세상 그 자체였고, 미림은 그 중심이었다.

어떤 날은 떡볶이를 선택하고 버스를 포기했다. 차비를 다 써버리고 친구들과 1시간 넘게 걸어 돌아가는 길. 땀은 났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미림탕 앞에는 소바집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읍내 곳곳에 소바집이 생겼지만, 그때 그 집이 의령 소바의 원조였다. 겨울이면 목욕을 마친 뒤 부모님 손에 이끌려 들어가 따뜻한 국물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한 그릇을 비웠다. 그 맛엔 지금은 흉내 낼 수 없는 옛 정취가 배어 있었다.

이 소리와 냄새, 온기가 모여 있던 곳, 그 모든 것이 미림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떠났고,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20년 동안 미림탕은 철문이 굳게 닫힌 채, 한때의 추억을 홀로 품은 흉물로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지날 때면 늘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아름다운 숲’이 이렇게 오래 시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림탕이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의령군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중동주민어울림센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제 그곳에는 뜨거운 김 대신 커피 향이, 목욕물 대신 대화의 물결이 흐른다. 누군가는 세탁기를 돌리며 기다림을 배우고, 누군가는 학습실에서 꿈을 키운다. 몸을 씻던 공간은 이제 마음을 씻는 곳이 되었다.

나는 이 변화가 단순한 건물의 재탄생이 아니라, 의령이 사람을 다시 품는 방식의 부활이라 생각한다. 미림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20년의 침묵 끝에 다시 피어난 미림은 이제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희망이 만나는 자리다.

미림(美林). 이름처럼 다시 아름답게 자라난 숲. 그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온기가 있다. 흉물로 남았던 시간조차 오늘의 미림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거름이 되었다.

언젠가 또 다른 세대가 이 길을 걸으며 말하겠지.

“여기가 예전엔 미림탕이었대.”

그때의 아이들이 미소로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미림은 완전히 되살아난 것이다. 비누 냄새 대신 시간의 향기가, 추억 대신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는 숲. 그곳이 다시 피어난 미림이다.

/장명욱 의령군 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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