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작·납세·노역·병역까지 맡았던 농민
그런 제도로 어떻게 강대국을 막겠는가

우리나라 농사와 농촌 역사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든 농민이 잘사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듯한 정치 제도가 저지른 비인간적 폭력적 증거들이다.

이런 정치 제도는 주자학이라 부르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왔다. '천경지의(天經地義·하늘이 바른 길을 얻고, 땅이 적절 함을 얻는 길이라는 뜻. 정당하고 변할 수 없는 도리를 이르는 말)',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선비, 농부, 장인, 상인 네 가지 신분) 계급 제도는 하늘이 낸 것이어서,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士)는 곧 양반 사대부를 근간으로 한 귀족과 왕족이며, 조선의 모든 정치권력과 토지와 나라의 역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다.

농(農)은 곧 농사와 농촌의 모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농민과 토지를 뜻한다. 그런데 그 농민에게는 농사지을 토지의 소유권이 없다.

조선의 모든 토지 주인은 오직 한 사람 '임금(王)'뿐인데, 흔히 유식한 말로 '왕토사상(王土思想)'이라 불렀다.

그 토지는 임금의 뜻에 따라서 양반 사대부들에게 제한적으로 소유권이 주어졌다. 이른바 공신전을 비롯 온갖 정치적 명분으로 거듭거듭 특혜와 은전으로 내려받았다.

그 토지는 모두 후손들에게 대물림되면서 온갖 부정부패 수단으로 국토를 야금야금 잠식하며 천 석, 만석 지기 부자들이 조선 곳곳에서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그 토지는 경작해야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 그 몫은 모두 농민들이 했다. 농민들은 국가토지와 양반사대부 토지의 소작인으로 붙박여서 생존을 갉아 쑤셔 넣고 농사를 지어 주고는 7 대 3 또는 6 대 4 비율로 수확량을 나누었다. 소작민들은 3 아니면 4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들 몫으로 받은 수확물에서 소득세와 재산세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해 겨울 동안 양식이 동나고, 봄부터는 굶주림의 저주로 고통받았다.

이른바 '춘궁기'라는 애절한 잔혹사가 그렇게 씌여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양반 사대부들은 소득세도, 재산세도 면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점점 더 재산이 늘어만 갔고, 그 힘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해 조선을 지배할 수 있었다.

농민들은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 교육의 혜택으로 글자를 배우고 익혀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통제하고 탄압받았다.

이 같은 정치·사회적 제도의 틀 속에서도 농민들이 도맡았던 임무는 많고, 크고, 무거웠다. 모든 조선사람들의 식량과 옷감, 땔감을 마련해 나라에 바치고, 국가 수호를 위한 병역 의무를 지녔으며, 도로, 성벽, 하천 공사도 전담해야 했다. 모두 강제 노역이었다.

병역의무는 농번기가 아닌 계절에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병역의무가 농민들의 육신과 정신을 들볶았다.

양반계급은 병역의무가 없었고, 전문직과 상업, 그리고 전체 국민의 20%가 넘은 천민들도 병역에서 제외되었다.

그 같은 군사제도로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전쟁 도발을 방어하며,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결과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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