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농지개혁 후 땅 갖게 된 소농들
처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끼게 되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옛 민속에서 생긴 속담인데, 그 의미가 더욱 절절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은 1950년대와 그 뒤 20여 년 동안에 생긴 농촌사회의 구조적 변화에서였다.
그 변화란 1950년에 단행된 농지개혁법의 좋은 영향으로, 비록 작지만 집에 농토를 갖게 된 농민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키운 자식들이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자라난 긍지와 보람을 의미한다. 옛부터 우리나라 농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토지를 가질 수 없었다.
모든 땅은 임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39년을 기준으로 해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76%의 농가가 대지주의 농지를 빌려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수확량의 50~60%를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쳤다고 한다. 나머지 24%의 농가는 얼마쯤의 집이 토지가 있었거나, 소작할 땅을 빌리지도 못하고 잡다한 품팔이 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도 이런 참담한 농업구조는 그대로인 채 6.25 전쟁을 겪었다. 전쟁이 휴전 상태로 바뀌고, 집권 여당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농민의 처참한 생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개혁의 칼을 뽑았다. 전체 국민 중에서 농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사회인데도, 자기 토지가 없는 농민 농가가 80%가량이었음은, 그동안 농민의 삶이 어떠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하여 농지개혁법이 많은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정부는 소수의 대지주들이 소유한 엄청난 토지를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몰수한 뒤, 소작농으로 살아온 농민들에게 자신들이 소작해 온 토지 일정 부분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기적 같은 농지개혁이 성공했다. 소수의 대지주가 국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평등한 소농(小農)의 나라로 바뀐 것이다. 비슷한 넓이의 농지를 가지고,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짓는 소농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농민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논밭에 가서 춤을 추거나, 조상에게 아뢰는 제사를 올리기도 하고, 한밤중이나 꼭두새벽에도 논밭에서 눕거나 엎드린 채 엉엉 울며 소리소리 치기도 했다.
이제는 자기 이름으로 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량을 모두 자기 소유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겨우 몇백 평에 지나지 않아도 농민 역사 여러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무지렁이 농사꾼의 이름으로 된 소유지가 생긴 것이다. 이제 농사꾼도 인간의 범주에 든 것이다. 민주주의며, 자유·평등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농사지을 땅과 수확물을 자기 소유로 해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절약하고, 부지런하게 정직한 땀으로 얻게 된 돈으로, 천 년 한이 된 자식 교육을 도와서 농사꾼이라는 비천한 대우를 원망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자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인간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여태껏 미워하고 원망했던 악덕 지주들, 왜놈 앞잽이들, 빨갱이와 미군정 앞잽이들에게 모두 마음에서 내려놓기로 했다. 들고 있어 봐야 논밭 거름으로도 쓸 수 없는 쓰레기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이제는 농사에 도움이 되는 부지런함과 정직함이라는 거름 장만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기를 마음을 다잡았다. 내 땀을 바칠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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