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한평생 부지런히 살아온 농부
가난하지만 욕심내지 않은 삶 존경

우리 동네 김 씨는 여든한 살이다. 나를 부를 때 '정 생원'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저녁 어둠살이 내릴 때까지 거의 날마다 12시간 넘게 농사일을 한다.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병에 담아와서 마신다. 일하다 허기가 지면 삶은 고구마, 옥수수, 감자를 먹는데 가만 앉아 쉬면서 먹지 않고, 먹으면서 일을 계속한다. 휴식 시간이 따로 없다. 어떤 경우에도 품삯을 주고 일꾼을 구해 쓰지 않고 김 씨 내외가 다 해치운다.

김 씨 이름으로 등기된 땅은 논 800평과 콘크리트 주택이 있는 대지 150평이 전부다. 그런데도 올가을 농협에서 사들이는 벼 매상에 내놓으려고 40㎏들이 200포대를 준비해 두었다. 보통 200평당 40㎏짜리 10~12포대를 수확하는데, 200포대를 수확하려면 논 4000평이 필요하다. 김 씨 논에서는 40포대 정도니까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 논을 빌려서 수확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일벌레, 일 중독자, 일에 홀린 사람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그를 지독한 가난의 두려움과 슬픔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가난의 서럽고 아픈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할 것이라고도 한다.

김 씨 집은 동네 빨래터 곁에 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면장을 지낸 조 씨 집 머슴이자 하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살았던 두 칸짜리 흙담집을 허물고 지금의 콘크리트 집이 들어선 것은 1980년대 끝 무렵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머슴살이하고도 간신히 천수답 두 마지기를 김 씨한테 유산으로 남기고 6.25 때 조 면장집 막내아들 대신 탄약짐을 지고 인민군을 따라갔다가 죽었다.

전쟁 뒤 자유당 시절 토지개혁 때 그의 아버지가 남긴 천수답 두 마지기는 조 면장집 둘째아들이 아버지 몰래 소유권 등기를 해버림으로써 고스란히 빼앗겼다.

김 씨는 어린 시절부터 머슴살이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몸집이 작았다. 조 면장집 하인처럼 온갖 궂은일 다해주고 얻어 온 먹거리로 자식 셋을 굶기지는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김 씨에게 남긴 것은 아무리 배가 고프고 살기 어려워도 남의 것 훔치면 안 되고, 거짓말하면 안 되고, 늦잠 자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시간은 많은 변화로 역사를 지었다. 조 면장집 둘째아들이 자유당 말기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연거푸 낙선하고, 빚이 많아져 재산을 몽땅 처분하고서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그 많던 토지는 산산조각났다.

그중에서 김 씨가 대리 경작하는 논 3200평도 그렇게 처분된 것인데, 여러 사람 손을 거치다가 지금의 외지인 누구한테인가 이전된 다음 김 씨가 대리 경작하고 있었다.

아버지 천수답 두 마지기를 빼앗아 간 조 면장집 둘째아들은 아직 살아 있는데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 김 씨에게 한번 물어봤다. 조 면장 둘째아들을 만나보겠느냐고. 보면 뭐하것소? 정 생원 보기에는 내가 가련해 보이겠지만, 나는 죽자사자 발버둥쳐도 이 꼴밖에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고마….

그래도 나는 남의 것 도둑질 안 했고, 거짓말로 배 채운 일은 없소. 그래도 맘은 많이 아푸요.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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