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평생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여성
시댁 뒷바라지·농사일 고되고 설운 삶
구월아지매는 우리 동네로 시집온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그분 이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남편과 자식들 말고 동네 사람은 그저 구월댁, 진두 마느래, 영이 즈그매, 선동이 즈그 할매라 부른다. 남편은 김진두, 딸내미는 김영이, 손자는 김선동이라 부르면서 구월아지매만 구월댁이다. 남편은 85세. 작년 여름부터 치매를 앓아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월댁은 남편의 그 망각의 시간 위에서 지난날을 낱낱이 떠올리며 84세 노년의 봄날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서 울먹이는 날이 많다. 도로 확장으로 집 앞 논이 거의 잘려나가고 귀퉁이에 조금 남은 자투리땅에 심은 상추를 뜯는 구월아지매한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아지매는 말할 줄 모른다며 한사코 사양하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띄엄띄엄 옛일을 얘기해 주었다.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고 좀 먼 곳에서 들어온 사람인 데다 붙임성도 별로여서 이웃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이사온 지 10년쯤 지난 어느 초겨울에 내가 아지매 남편에게 아쉬운 부탁을 했었다. 메주를 쑤어 방안에 넣고 띄우기를 위해 볏짚이 조금 필요했다. 길옆 김진두 씨 논바닥에 널린 짚 한 줌만 줄 수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김진두 씨는 "내한테 뭐 준 적 있소?"라고 했다. 불을 뒤집어쓴 것 같이 무안했다. 10년 넘게 이웃으로 살면서 내가 그분한테 먼저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 그분한테서 산다는 것의 본질이 관계임을 다시 깨달았다. 그해 겨울 나는 이런저런 관계로 제주 밀감이 더러 생겼기에 그 집 대문 앞에 밀감을 담은 비닐봉지를 두어 번 갖다두었다. 우연히 구월아지매가 우리 식구에게 밀감 얘기를 하기에 아마 내가 가져다 두었을 거라 말했다고 했다. 그 뒤부터 서로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구월댁이 시집왔을 때 시조부, 시부모, 남편 형제 10남매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셋째 아들인데, 공부머리가 없어서 일찌감치 농사에 붙박여서 집안을 돌보았다. 두 형은 도회지로 나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결혼하고 따로 살고 있었고, 시누이 다섯은 구월아지매 손으로 모두 시집보냈다. 시동생 둘도 대학까지 마친 뒤 모두 장가들여서 따로 산다. 시조부모 모두 타계한 뒤 시아버지는 재산을 분할했다. 논 마흔 마지기 중에서 큰 시숙한테 스무 마지기를 떼어주고, 나머지 스무 마지기를 네 아들에게 다섯 마지기씩 고루 나누었다. 큰 시숙 내외는 지난 세월 부모 밥상 한 번 제대로 차려준 적 없지만, 장손이라는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단다. 조상 제사 7개 모두 구월댁이 모시고, 집안 크고작은 일 모두 구월댁이 챙기지만, 큰동서는 언제나 바쁘고, 시간이 없고, 할 줄 모른다는 말로 귀빈처럼 살아왔다. 구월댁이 덮어쓴 것은 시부모님 사시던 시골집과 가난한 몸에 든 깊은 골병뿐이다. 구월댁이 말했다. "우리 집 양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좋을지 몰라도, 나는 온갖 것이 다 기억이 나서 섧고 또 섧구마요. 내가 지은 죄가 많은 갑소."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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