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김해평야 명성 그리 오래지 않았다

김해에는 장유사(長遊寺)·은하사(銀河寺)라는 절이 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물으면 위치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이곳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들어봄직한 이야기가 있다.

여름날 찾는 이 많은 장유대청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장유사와 만나게 된다. 입구에 있는 불상은 시선을 그리 오래 잡아두지 못한다. 이름난 다른 것에 비하면 절 분위기도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이 펼쳐지지만, 산 능선이 방해하는 탓에 시원스럽지도 않다. 이러다 보니 그 이름이 묻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이 절에 의미를 새기고자 하는 것은 담긴 이야기 때문이다.

장유사는 우리나라 불교 남방유래설을 뒷받침하는 절로 입에 오르내린다. 가락국 수로왕 처남인 장유화상(長游和尙·허보옥)은 인도 아유타국 태자이자 승려였다. 수로왕 왕비인 누이동생 허황옥(許黃玉)을 따라 가락국에 왔다가 서기 48년에 이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통해 불법이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또 한편으로는 수로왕이 허황옥과 달콤한 신혼을 보낸 곳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장유사./박민국 기자

물론 가락국 제8대 질지왕(451~492) 때 허황옥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하겠다.

삼방동 신어산 서쪽 자락에 있는 은하사 역시 장유화상이 만들었다 전해진다. 이 역시 자료가 부족하지만, 인도불교 전래 기념으로 이곳에 지어 이름을 서림사(西林寺)라 하였다가 이후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지금 찾는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은하사.

구산동 수로왕비릉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돌 6개가 쌓여있는 게 전부로 볼품은 없다. 파사석탑은 수로왕 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온 돌이라 전해진다. 허황옥은 이 돌을 싣고 장유사 앞까지 배편으로 왔다고 한다. 너른 땅만 펼쳐져있는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 당시는 장유사 인근에 물이 일렁였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철·바다'를 담은 김해(金海) 지명을 새삼 생각해 보게 한다. 김해는 가야시대 때 해상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진 지역으로 드러나 있다. 김해가 지명에 처음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 756년이다. 바다가 지명 속에 녹아든 것이다.

그랬던 이 지역이 지금은 평야지역으로 뒤바뀌어 있다. 이는 해수면 변화와 일제 강점기 때 물 들어온 지역을 낙동강 흙으로 메우고, 수리시설을 조성해 지금과 같은 평야를 인위적으로 이뤘기 때문이라 한다.

김해평야.

장유면에 다시 시선 두자면, 이곳은 김해지역 신도시 상징으로 2013년 7월 3개 동으로 전환된다. 대청리 중심가는 밤이 되면 어지러운 불빛이 일대를 휘감는다.

이러한 장유면에서 이 시대 마지막 전통 유림장(儒林葬)이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다. 장유면 관동리에는 조선시대 때 유교 가르침이 이뤄졌던 월봉서원(月峯書院 )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7년 7월, 전국 유림 1000여 명이 이곳에 모였다. 영남 기호학파 마지막 유학자인 이우섭 선생이 76년 세월을 뒤로하고 타계했을 때다. 유림장은 열엿새 동안 이어졌고, 장례행렬 때는 200여 개 만장이 장유신도시에 휘날렸다.

김해에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 흔적도 있다. 남명 선생은 합천에서 나고 산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30세 때 김해에 정착해 18년 동안 학문을 연구한 곳이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산해정(山海亭)이다.

하지만 오늘날 김해는 합천·산청이 남명 선생을 크게 이름 내거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문의 없이 찾았다가는 잠겨있는 문고리만 보고서는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동상동·서상동 쪽은 김해를 또 다른 모습으로 채운다. '서울 이태원'을 떠올리게끔 하는 외국인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전 국제결혼 한 수로왕·허황옥 숨결이 이어지는 것인지, 수로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종로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넘쳐나고 일대 가게 간판은 여러 외국어로 표기돼 있다. 다문화음식점도 수십 개에 이른다.

한림·주촌면 쪽 공단을 중심으로 일거리 찾아 모여든 외국인이 현재 1만 5000명을 훌쩍 넘는다. 구도심인 동상동·서상동은 물건값이 싸고 전통시장까지 있다 보니 외국인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이 다문화 안식처는 입소문이 나면서 인근 창원·부산 외국인 노동자 발걸음까지 옮기게 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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