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으로 화려하게 역사에 데뷔…김해평야·노무현 현대사 관통

김해시 활천동·회현동·부원동이 모여 중심가를 이룬다. 내외동은 전형적인 시가지다. 중심가와 시가지 사이는 경전철이 가로지른다. 빼어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전형적인 도시 풍경이다. 하지만, 김해가 지닌 가장 큰 자산은 도시 경계 너머에서 시작한다. 도심을 둘러싼 너른 들판이 그것이다. 칠산서부동을 비롯해 주촌·장유·대동면으로 펼쳐진 평야는 경남은 물론 이 나라에서 손꼽는 비옥한 땅이다. '김해 흉년 들면 경남이 굶는다'는 옛말에 허세는 없다. 김해는 평야다.

도심과 너른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본 곳은 김해시 중심에 솟은 분산이다. 분산 정상에는 지난 2002년 개관한 김해천문대가 있다. 일반인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관측시설이다. 천문대가 있는 분산 높이는 382m이다. 1000m를 예사로 넘나드는 서북부경남 산세와 견주면 내세우기 멋쩍다. 그럼에도, 이 나지막한 산 정상에서 김해 도심과 들판은 눈에 걸리는 것 없이 펼쳐진다.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라고 해봤자 그 너머 들판이 보일 정도 높이다. 내세울 만한 산세가 없는 이 땅은 그만큼 넉넉한 들판을 보듬을 수 있었다.

김해의 평야가 아닌 김해평야

서북쪽에서 김해와 밀양을 가르는 낙동강은 동쪽으로 흐른다. 강은 다시 김해와 양산을 경계 짓는다. 그리고 남쪽으로 꺾이는 낙동강에서 빠져나온 서낙동강 줄기가 김해와 부산을 일부 가른다. 김해평야는 이 낙동강 줄기가 나른 흙이 쌓인 삼각주다.

김해 천문대서 내려본 김해 전경./박민국 기자

호남평야와 더불어 '이 나라 대표 곡창지대'라는 김해평야 명성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얻기 시작했다. 1932년 '대저제방'이 완공되기 전까지 너른 들판은 그저 홍수 피해가 잦은 습지였다. 대저제방은 낙동강 서쪽 분류인 죽림강에서 녹산 노적봉까지 32㎞ 길이로 이어졌다. 습지는 제방이 들어서고 나서야 농지로 쓰일 수 있었다. 대저제방은 홍수 피해를 줄이면서 바닷물 침입도 막았다. 대저제방 건설 이후 드러난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관개 시설은 꾸준히 나아졌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김해와 부산 북구를 아울러 면적 1만 3000㏊가 넘는 들판은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해낸다.

하지만, 김해평야는 이름과 달리 오롯이 김해 것이 아니다. 197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저·명지 등 비옥한 땅은 부산으로 넘어간다. '김해공항'이 부산에 있는 공항이 된 것도 이때다. 게다가 1989년 가락·녹산까지 부산 강서구로 편입되면서 김해평야는 상당 부분 부산 것이 된다. 이 나라 최대 곡창지대라는 감탄을 오늘날 여기 사람들이 민망하게 받아넘기는 이유다.

대동화훼단지./박민국 기자

그렇더라도 경남 농업을 말하면서 김해 앞에 둘 수 있는 지역은 별로 없다. 한림·생림·상동·대동·진례·장유 등 이 땅에 고루 퍼진 들판이 쏟아내는 농작물과 채소, 과일은 그 종류와 양에서 항상 두드러진다. 굳이 김해평야를 들먹이지 않아도 경남 농업이 비빌 언덕은 김해다. 더불어 전국 최대 꽃 생산지인 '대동화훼단지'가 있는 곳도 김해라는 것을 빼놓아서는 안 되겠다.

자랑하고픈 가락국 흔적

역사에 남아 있는 가야 흔적은 빈약하다. 가야인들이 남긴 기록이 없는데다 가야를 병합한 신라도 그 기록에는 소홀했던 탓이다. 오늘날 남은 가야사는 〈삼국유사〉에 조금 남은 기록에 대부분 기댄다. 그래도 가야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 흔적이 가장 풍부한 곳은 김해다. 김해시 행정 역시 가야문화 자랑에 상당히 공을 들인다.

수로왕릉.

가락국 시조 김수로(?~199)를 모신 수로왕릉은 서상동에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199년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뒤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라 했다'고 남아 있다. 수로왕릉은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됐다. 위치로 보면 대략 김해 가운데 있는 이 왕릉은 가야 고도(古都)는 김해라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는 듯하다.

수로왕릉에서 2㎞ 정도 북쪽으로 가면 구지봉이 있다. 가락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서사시 '구지가(龜旨歌)'가 불린 곳이다. 신화 배경이 아니라면 나지막한 언덕에 지나지 않은 구지봉을 넘어가면 잘 정돈된 수로왕비릉이 나온다. 신비롭기로 따지면 수로왕 못지않은 왕비 허황옥(33~189년)은 고대 인도 아유타국 사람이다. '역사 최초 국제결혼'이라는 이곳 사람들 얘기도 재밌지만, 학자들은 고대 가락국이 인도까지 교류했다는 점에 더 주목한다. 허황옥과 동행해 남방불교를 전했다는 오빠 장유화상 흔적은 김해에 있는 절 몇 곳에 전설로 남아있다.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와 동림사, 불모산에 있는 장유사 등이다. 장유사에 있는 '장유화상사 사리탑'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돼 있다.

가야문화는 곧 철기문화다. 기록은 빈약한 가야사 주도권을 김해가 틀어쥘 수 있는 까닭은 풍부한 철기문화 흔적에서 나온다. 1920년 발굴이 시작된 봉황동 유적은 국내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유적 발굴을 통해 발굴된 토기 조각은 독특한 무늬 덕에 '김해토기'라는 이름을 따로 얻었다. 또 도끼, 손칼 같은 철기와 함께 동물 뼈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도 발굴됐다.

특히 유적 속에서 재가 돼 나온 쌀은 한국 벼농사 시작을 짐작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더불어 이후 발굴을 통해 찾아낸 돌널무덤과 독무덤에는 청동제품이 함께 나왔다. 김해는 지난 2001년 근처 회현리패총과 더불어 유물이 나온 일대를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했다.

사적 제341호로 지정된 '대성동고분군'은 1990년 발굴이 시작됐다. 가락국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는 지석묘, 토광묘, 목관묘 등 다양한 형식을 띤 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 안에서는 토기, 철제 농기구, 마구, 갑옷 등과 더불어 순장자까지 확인됐다. 당시 묻혔던 사람이 누렸던 부와 권력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지난 2003년 개관한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는 무덤에서 나온 다양한 유물과 고분 발굴 상황을 그대로 복원한 현장을 볼 수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 바로 위쪽에는 '국립김해박물관'이 있다. 김해는 물론 경남에 두루 걸친 가야문화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1998년에 개관한 국립김해박물관에는 가야 유물 13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부산 덕에…, 부산 탓에…

김해 인구가 30만 명을 넘어선 해는 1997년이다. 그리고 2010년 들어 인구 50만 명을 넘어섰다. 인구 규모만 따지면 경남 2위 도시다. 하지만, 이 같은 위상은 양쪽에 낀 대도시 창원과 부산 때문에 움츠러드는 면이 있다. 특히 이 나라 제2도시인 부산을 옆에 둔 김해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김해시 성장은 상당 부분 부산에서 비롯한다. 너른 들판에서 거둔 넉넉한 작물을 재산으로 바꿔준 곳은 영남권 제1 소비지역인 부산이었다. 이곳 농민들은 더 생산하지 못하는 일은 있어도 더 팔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지런을 떠는 만큼 살림을 불릴 수 있었다.

기적의 도서관./박민국 기자

더 기민한 농민들은 축산물에 눈을 돌렸다. 농사와 같은 품을 들이면서 더 나은 소득을 당길 수 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소·돼지를 부지런히 키웠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르게 산업화에 들어간 부산에서 점점 발붙이기 어려워진 도축장이 김해로 넘어온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공들여 키운 가축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 역시 부산이었다.

김해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뛰어든 수많은 이들에게 알뜰한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부산 사상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상당수는 집값이 싼 김해에 집을 구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구할 수 있는 싼 집은 팍팍한 살림에 큰 위안이 됐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부산에서 번 돈을 김해에서 썼다. 김해 살림은 그렇게 또 불어날 수 있었다.

농업과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김해에 공단이 몰려든 시기는 1990년대다. 농사밖에 지을 수 없었던 들판은 농지법 개정으로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비싼 땅에서 허덕이며 공장을 돌렸던 부산 기업인들은 재빠르게 너른 들판으로 눈을 돌렸다. 부산에서 공장 하나 지을 돈으로 김해에 공장 두 개를 짓고도 돈은 남았다. 여기 사람들은 이 시기 부산에서 경영난을 겪었던 많은 기업이 김해에서 재기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일단 들이닥친 공장은 풍족한 일자리를 제공했다. 대부분 농민이 살았던 이곳에는 안팎에서 기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단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비지역은 다시 형성됐다. 김해는 또 그렇게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낙동강 너머 큰 도시가 김해에 무작정 내주기만 할 리는 없었다. 일단 부산은 두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해평야 상당부분을 앗아갔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해는 비옥한 땅과 함께 나라 안에서 이름 높던 두 가지 농산물 이름을 잃게 했다. 바로 명지에서 나는 파 '명지파'와 대저에서 나는 배 '구포배'다.

때가 되면 낙동강 하구를 뒤덮던 철새 풍경도 원래는 김해 것이었다. 을숙도를 비롯해 낙동강 하구 갈대가 우거진 습지는 철새들이 머물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새 안식처 역시 부산 것이다.

부산에서 밀려들어 온 공장은 김해를 키우기도 했지만 망치기도 했다. 미처 행정 손길이 닿기 전에 들판 곳곳에 들이닥친 공장은 '난개발' 전형을 만들었다. 산업화와 동시에 들이닥친 공해는 김해 환경을 적잖이 망쳐놓았다.

가장 극적이고, 비극적인 대통령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마을 가운데 넓게 깔린 1만 5000여 개 판석 각각에는 그리움 가득한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판석을 가로질러 끝에 닿으면 누운 비석 하나가 있다. 비석을 받친 붉은 철판 위에는 묘지 주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가 새겨져 있다.

봉하마을./박민국 기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16대 대통령 노무현(1946~2009). 군사독재 정권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던 그는 1988년 부산 동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TV로 생중계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인들을 치밀하게 추궁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다. 하지만, 노무현은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주도한 '3당 합당'에 맞서 그를 정계로 이끌었던 김영삼과 결별한다. 이후 1992년 14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을 거듭하다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 그리고 2000년 영호남 지역갈등 해결을 내세우며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 출마하나 낙선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친 뒤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한 노무현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선다. 이 경선에서 처음 도입한 국민참여 경선제는 그에게 큰 기회를 안긴다. 49일 동안 이어진 경선에서 72.2% 지지율로 대선 후보가 된 노무현은 그해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이회창과 맞붙는다. 선거 결과는 48.9% 대 46.6%, 2.3% 포인트차 승리였다.

참여정부 5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까지 겪으면서도 노무현은 탈권위주위, 개혁입법, 남북관계 등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긴다. 하지만, '양극화'로 대표되는 경제문제와 첨예한 진보·보수 진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며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내세운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준다.

2008년 고향인 봉하마을로 귀향한 노무현은 생태환경운동에 힘을 쏟는다. 하지만, 이후 불거진 친인척, 측근 비리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결국 2009년에 검찰에 소환된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새벽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진다. 가장 극적인 대통령은 가장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노무현 서거 이후 봉하마을에는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 그를 추모한다.

가야 바닥에 얹힌 김해문화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반경 1~2㎞ 안에는 옛 가야문화뿐 아니라 오늘날 김해문화가 함께 펼쳐져 있다. 이 가운데 내동에는 김해를 대표하는 문화시설인 '김해문화의전당'이 있다. 1464석 대공연장, 540석 소공연장을 비롯해 미술관, 스포츠센터, 문화강좌실, 영상미디어센터, 야외공연장까지 갖춘 시설이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봉황동에는 '김해한옥체험관'이 있다. 숙박할 수 있는 시설로 전통 가옥 멋에 현대 가옥이 지닌 편리함을 조화롭게 엮었다. 한옥체험관 주변은 바로 수로왕릉, 김해민속박물관, 봉황동 유적지 등 가야문화 흔적으로 넘친다.

진례면에 있는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은 도자와 건축을 주제로 한 전국에 하나뿐인 전시관이다. 흙(Clay)과 건축(Arch)을 의미하는 단어 조합에서 알 수 있듯 도자를 재료로 한 다양한 건축적 시도를 접하면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미술관 옆에는 김해가 자랑하는 멋인 분청도자기를 경험할 수 있는 '김해분청도자관'이 있다. 〈경상도 지리지〉에 '김해 토공산물은 자기'라고 기록됐을 정도로 김해 분청사기는 역사가 깊다. 김해분청도자관에서는 분청사기 역사와 작품을 볼 수 있으며 도예체험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1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고대문화와 현대문화가 두루 호흡하는 곳. 너른 들판을 품은 풍요로운 땅이 내비치는 매력은 그렇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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