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산불에 탄 하동 1000살 은행나무
5월 틔운 새순보고 위로 얻은 가수 박혜리
“새로운 시작, 자연과 연결돼있음을 느껴”
“언젠가 모든 걸 잠시 멈춰야 할 때/ 그런 순간이 내게 온다면/ 떠나야 하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늘로/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었던/ 세계의 끝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 모든 게 나에겐 새롭기만 해/ 버려진 들판, 저녁 하늘, 그리운 고향길/ 마음을 뺏기고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네/ 외롭고 설레는 기분/ 말은 달랐지만 마음으로 얘기 나눌 수 있었지/ 때론 숨 가쁜 오르막도 두렵진 않았어/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다시 걸어갈 뿐/ 아 나는 제법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구나/ 아 나는 제법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구나” (박혜리 ‘세계의 끝’ 가사)
작곡가, 아코디언 연주자로도 활동하는 가수 박혜리(45)는 지난달 15일 유튜브에 ‘하동 두양리 1000살 은행나무 할머니와 함께 한 세계의 끝’이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산속 흐르는 물소리, 나지막한 새소리를 배경으로 최힘찬(35)의 기타, 박혜리의 아코디언이 잘 어우러진 이 영상에는 다음 글이 달려 있다.
“잦은 침략과 전쟁을 치른 이 땅에서 천년을 살아낸 나무가 지난봄 경남을 휩쓸고 간 화마에 처참하게 불타 쓰러졌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서 다시 새 잎을 틔우고 있었다. (중략) 정말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기적적으로 회복 중인 나무 할머니 힘내시라고 노래 들려드리러 가서는 나야말로 너무나 큰 치유의 에너지를 받았던 시간. 그 힘이 노래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지난 봄 박혜리는 지리산 나무가 불타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고 “한 시대의 기억이 사라지는 걸 보는 듯했다”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돼 있고 어느 한 곳의 상처가 결국 모두의 고통이 된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3월 21일 시작한 경남 지역 산불 사흘째에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우방산 자락에 있는 1000년 은행나무가 불에 타 큰 줄기 여러 곳이 부러지고 말았다. 최힘찬이 박혜리에게 쓰러진 은행나무 이야기를 들려줬고 박혜리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어른을 잃은 마음이었다”라고 말했다.
올해 5월 기적적으로 은행나무에서 새순이 자랐다. 가지 끝에 원래 나무가 머금던 물로 새싹이 터져나왔다. 땅에 떨어진 은행 열매에서 새순이 났다. 이 사실을 알고 박혜리는 큰 위로를 얻었다. 그래서 같이 공연을 다니던 기타 연주자 최힘찬과 함께 나무를 직접 찾아가 앞에서 노래한 것을 영상으로 담은 것이다. 이때 박혜리가 부른 노래는 ‘세계의 끝’이다.
“두양리 은행나무는 마치 끝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존재로 느껴졌어요. 제가 쓴 ‘세계의 끝’이 떠오르더라고요. 이 노래는 지친 여정의 끝에서 부르는 노래에요. 그 끝은 다시 살아가게 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은행나무 할머니를 직접 보고 싶었던 그는 마침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진주 초전공원에서 열린 정원산업박람회에 공연을 하게 된다. 최힘찬과 공연 일정을 마친 후 바로 하동으로 향했다.
둘은 은행나무 할머니를 만나고 생명과 회복, 희망을 보았다. 최힘찬은 이때를 떠올리며 “정반대되는 두 개념이 사실은 동전의 앞뒤처럼 다르지 않고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직접 느꼈다”고 설명했다. 불에 탄 나무 속은 텅 비었는데, 많은 생명이 나무를 뒤덮은 것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박혜리는 “죽음의 자리를 딛고 다시 살아나는 그 모습 앞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경외감, 위로를 느꼈다”고 말했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거대한 순환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럼에도 자연은 끝내 스스로 치유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섭리를 깨달았다. 그는 이번 영상을 사람과 자연 음악이 함께 만든 노래라고 말한다.
이날 박혜리는 은행나무가 자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었다고 느꼈다.
‘회복할 힘은 우리 안에 있고, 그 힘을 느낄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그는 이 메시지를 노래를 듣는 이와 나누고자 하며, 자기 안에 있는 회복의 힘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두 음악가와 동행하고 영상을 촬영한 최세현 지리산초록걸음 대표는 “깊은 산 속에서 소음도 없었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영험한 순간이었다”면서 “두양리 은행나무는 인간은 헤아리지 못할 1000년의 역사를 지녔기에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이고 아픈 역사를 지닌 은행나무이기에 지금이라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동 두양리 1000살 은행나무 할머니와 함께 한 음악 영상은 앞으로 2편을 더 게시할 예정이다. 박혜리의 ‘아침이 오면’과 ‘여행자의 마지막 걸음’이란 곡과 함께다.
‘아침이 오면’은 실제 박 음악가가 히말라야에서 홀로 여행 중 고산병을 앓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절실한 순간을 담은 음악이다. 이번 촬영으로 평화로운 지리산에서 아침을 맞이하면서, 그가 바라던 아침의 모습을 만난 것이라 여겼다. ‘여행자의 마지막 걸음’은 세상에서의 여행을 먼저 마친 이들을 위한 곡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배웅하는 마음, 남겨진 우리가 그 여정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지었다.
박혜리는 14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무소유’로 동상을 받았다. 이후 밴드 두번째달 소속으로 2005년 드라마 <아일랜드>에 수록된 ‘서쪽하늘에’를 작곡했다. 지금은 밴드 바드, 정원영 밴드, 패치워크로드 그룹 활동과 음악감독 일을 하고 있다.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에서 연주한 3곡은 4월에 발매한 박혜리 20주년 기념 음반 <서성이던 기억들>에 담겨 있다.
/주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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