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방재ㆍ두양리 은행나무에 담긴
고려시대 은열공 강민첨 장군 이야기
진주 진강현 유학 서생 출신 문관이나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거란과 싸워 귀주 대첩 승리 이끌어

지난달 21일 산청서 시작한 산불로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두방재와 두양리 은행나무가 피해를 봤다. 두방재는 부속 건물 2채가 타고, 두양리 은행나무는 뿌리를 제외한 90%가 불에 탔다. 두방재와 두양리 은행나무는 모두 고려시대 활약한 은열공 강민첨(963~1020) 장군과 깊이 관련된다. 2023~2024년에 방영된 KBS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 고려의 숨겨진 명장(이철민 분)으로 등장한다. 두방재는 강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두양리 은행나무는 강 장군이 어릴 적 심은 나무로 알려졌다. 각각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와 경상남도 문화유산 기념물로 지정되며 강 장군의 호방한 기개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23일 불에 탄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 1788년 조선 화가 박춘빈이 원본을 옮겨 그린 고려시대 은열공 강민첨 장군 초상화. 이 초상화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됐다. /국가유산청 누리집 갈무리
23일 불에 탄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 1788년 조선 화가 박춘빈이 원본을 옮겨 그린 고려시대 은열공 강민첨 장군 초상화. 이 초상화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됐다. /국가유산청 누리집 갈무리

유학 공부한 서생, "장군감일세!" =강민첨 장군은 진주 진강현 출신이다. 963년 11월 29일 진주시 옥봉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해 향교에서 배움을 얻었다. 학업을 마친 뒤엔 사교당을 세워 고을 청년들을 가르쳤다. 1005년 문과 제술과에 합격했다. 문관이니 활을 쏘거나 말을 타는 등 무인으로써 갖춰야 할 소양이 뛰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사명감과 추진력이 있었다. 현실 세력 관계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군사를 전략적으로 이끄는 데 능했다.

고려시대 전반을 정리한 역사서 <고려사>에서 강 장군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민첨은 서생 출신으로 기용되었으므로, 사어(활쏘기와 말타기를 아우르는 말)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의지와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어서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워 드디어 현달하게 되었다." 

문관 출신이었지만, 거란과 전쟁에서 군사를 이끄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문관 출신이 무장을 겸하는 일이 허용됐던 시대적 배경도 있다. 강 장군은 1010년 애수진장에 임명된다. 애수진은 오늘날 함경남도 고원군 성남리 지역을 말한다. 이어 1019년 3월 고려 현종은 그를 응양상장군주국으로 삼았다. 이후 그에게 고려시대 내사문하성 정3품 관직에 해당하는 우산기상시가 내려졌다.

거란과 전쟁에서 활약하다 = 고려는 송나라와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에 거란은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여섯 차례 침입했다. 송나라와 전쟁 시 위협이 될 고려를 굴복시키고자 함이었다. 이 시기 강민첨 장군이 활약한 전투는 2차 전쟁(1010년 10월경~ 1011년 1월) 서경 전투와 마지막 6차 전쟁(1018년 12월~1019년 2월) 귀주 대첩이다.

하동군 옥종면 두방재. 강민첨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서후 기자
하동군 옥종면 두방재. 강민첨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서후 기자
3월 23일 불에 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은행나무. /이영호 기자
3월 23일 불에 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은행나무. /이영호 기자
산불 피해가 나기 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은행나무 모습. /독자
산불 피해가 나기 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은행나무 모습. /독자

거란이 2차 침입했을 때 강민첨 장군은 병력 15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거란이 맹렬하게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 평양인 서경에 다다랐다. 거란은 보병과 기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다. 당시 서경에서는 고려군 지휘부가 붕괴한 상황에서 강민첨과 조원이 각각 이끄는 군사들이 투입돼 방어전을 펼쳤다. 이들은 끝내 서경성을 지켜냈다. 서경성은 거란 배후를 위협할 만한 구심점이었다. 서경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거란은 군대를 철수해 개성으로 이동했다.

6차 전쟁은 거란 황제 사위였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데리고 침입하며 시작됐다.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대장인 상원수로, 강민첨을 대장 다음 군 통솔자인 부원수로 삼아 대응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를 주축으로 매복 기습작전을 벌였다. 또, 강물을 이용해 수공작전도 펼쳤다. 얼어붙은 하천에 물을 흘려보내 적을 흩어지게 한 후 분리된 적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고려군은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전술을 전개한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거란군은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곧 강민첨이 거느린 군사들에게 따라잡혔다. 조선 전기 편찬된 고려 역사서 <고려사절요>에 당시 강 장군의 활약이 이렇게 적혀있다.

"강민첨이 원수(장성 계급 중 하나)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재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그 공을 추념한다면 포상을 시행하기에 합당할 것이다." 

강 장군은 6차 전쟁을 치르고 1년이 지난 1020년 오늘날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로 맡는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59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백솔빈 기자

※ 참고 문헌

신성재 <고려 현종대 강민첨의 생애와 군사활동>, 백산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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