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출신으로 항일운동 앞장
시민단체 포상 신청 3번 만에
광복절 포상명단에 포함될 듯
"독립운동사 반쪽 찾는 계기"

독립운동가 김명시가 세 차례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끝에 유공자 인정을 앞두고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추서될 가능성이 큰 가운데 사망한 지 73년여 만에 21년에 걸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을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 김명시. /경남도민일보DB
독립운동가 김명시. /경남도민일보DB

경남지역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지난해 7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두 차례 모두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심사에서 제외됐다.

희망연대는 김명시가 포상에서 제외된 이유로 사망할 당시 직책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표기됐던 점을 꼽았다.

독립유공자 심사 기준을 보면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이바지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경우가 아니면 사안별로 판단해 포상을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 국가보훈처는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직책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근거로 판단한 셈이다.

하지만 희망연대가 이후 확보한 국토통일원 자료를 보면 북로당 창립대회 관련 문서에 김명시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북로당 정치위원회라는 조직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단체는 김명시가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자료도 제출했다. 북한 정권 수립에 공이 인정된 사람들을 안장한 국립묘지인 ‘신미리애국열사릉’에 김명시라는 이름은 없었다. 김명시와 비슷한 시기 남쪽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좌익활동가들은 이곳에 안장됐지만, 김명시 묘는 없었다.

국가보훈처는 희망연대가 추가 제출한 자료 검토를 마치고 오는 8.15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김명시를 포함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에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운 독립운동가”라며 “사회주의 활동을 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이바지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김 고문은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선정은 한국의 잃어버린 독립운동사 반쪽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열린 역사관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다면 사회주의 활동과 무관하게 공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명시의 오촌 조카 김미라(63·거제) 씨는 “우리 가족한테는 항상 훌륭한 영웅이었지만, 사회주의 활동 경력 때문에 밖으로 얘기할 수 없었다”며 “이제라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점이 인정받게 돼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독립운동가 김명시는 1907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돼 19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이후 1932년 국내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다 동지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39년 감옥에서 나온 김명시는 1942년부터 해방까지 조선의용군 지휘관으로서 톈진, 베이징 등에서 항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백마 탄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9년 부평경찰서에서 4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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