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광복 후 행적 불분명"
희망연대 "활동 뚜렷"의문제기
공적심사 상세 내용 요청 계획

마산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김명시(1907∼1949)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이 좌절됐다.

국가보훈처는 "김명시 선생의 공적을 심사했지만 포상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지난 15일 밝혔다. 포상을 신청한 열린사회희망연대(이하 희망연대)는 "김명시 장군이 포상되지 못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며 보훈처 조사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 장군은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1888∼1950)·조봉암(1899∼1959)과 함께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특별지부 조직 임무를 수행했다. 1930년 5월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징역 7년을 살았고, 출옥 후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인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산하 군사조직) 활동을 벌였다.

김명시 장군은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돼왔다. 지난해 정부가 여성과 사회주의 활동가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확대하기로 함에 따라 희망연대는 지난 1월 이순일 공동대표 이름으로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었다.

하지만, 보훈처는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이 안 된다는 결과를 통지했다. 희망연대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다.

김영만 희망연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이 1949년 10월 11일 부평경찰서에 구속됐다가 유치된 지 이틀 만에 자살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당시 경찰이 발표했는데 사망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김명시 장군 친족이 공개한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동생 김형윤 사진.
▲ 김명시 장군 친족이 공개한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동생 김형윤 사진.

그는 김명시 장군의 광복 후 행적도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고 했다. 김 고문은 "1945년 해방 이후 12월 전국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됐고, 이듬해 3월 부녀총동맹이 주최한 국제부인일 기념행사에서 강연한 기록이 있다. 1947년 10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8월 좌익 폭동 진상을 발표했는데, 이때 기소 중지 처분 명단에도 김명시 장군 이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다만, 1949년 사망 전까지 2년 행적을 찾을 수 없다. 이처럼 눈에 띄게 활동을 했음에도 '광복 후 행적 불분명'하다는 한 줄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희망연대는 보훈처에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를 위해 어떤 조사를 진행했는지 상세하게 알려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교수, 전문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서훈공적심사위원회에서 진행한다. 독립운동 당시 공적 확인 자료에 근거해 심사 대상자의 공적 내용,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에서 포상되지 못한 사유로 제시된 사항을 해명하거나 보완하는 자료가 확인되면 다시 심사할 수 있다. 추가 공적이 확인되더라도 독립운동 이후 행적에 이상이 있거나 친일 행위 등이 있는 경우 포상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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