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 문제에 묻힌 민족정기

한달 가까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고 화제는 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이다. 건강하게 살고싶어 하는 것이야 나무랄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북새통인 새에 정말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이 묻혀 넘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한성대 총장)와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문학평론가)는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한국언론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8월 발간될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800여 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잠시 논란도 됐지만 이내 잊혔다. 그리고 불거진 '탁경현' 문제.

가미카제 조선 청년…언론 대부분이 외면

탁경현(卓庚鉉). 일본명 미쓰야마 후미히로. 1920년 사천시 서포면 출생. 1926년 온 가족이 도일. 대학을 나오고 나서 일본군에 징집됨. 소위로 1954년 5월 11일 오키나와 비행장 서해상에서 특공기를 몰아 산화한 가미카제 조종사. 전후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 일본 논픽션 <호타루 가에루(반딧불이 돌아오다)>와 영화 <호타루>의 모델.

식민지 조선 여린 백성의 무너진 삶을 더듬어 보면 어디 성한 곳이 있을까만, 이이의 삶처럼 기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쪽에서는 전범이요 한쪽에서는 전신으로 신사에 봉안까지 하고 추모한다. 일본인 여성이 나서 그의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백방으로 힘써왔다. 그 결실로 지난 10일 사천시가 서포면에 그의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취소한 일이 있었다.

<경남도민일보>는 7일 자에 '강제징용된 조선 청년 탁경현 위령비 논란'이라는 기사로 1보를 내보내고 나서 9일 자에 '사천 가미카제 위령비 제막식 유보' 기사까지 모두 4건을 기사화했다. <경남신문>도 7일과 10일에 위령비 건립에 부정적인 여론을 보도했다. 그러나 <경남일보>는 4월 29일자에 '탁경현' 개인 삶의 기구함에 초점을 맞춘 칼럼을 내보낸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팩트 보도도 없었다. 취재·보도·배포 권역 내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경남에 적을 두고 있는 주요 일간지가 모두 팩트만 전달했거나 팩트 자체마저 외면했다.

방송은 진주MBC가 이 문제를 두번 전국 뉴스로 송출하면서 중요하게 다뤘다. 전국 매체도 크게 차이는 없었는데 연합뉴스와 오마이뉴스가 비교적 팩트 자체를 충실히 다루었지만 여타 매체에서는 단신으로 취급되거나 아예 빠졌다.

또, 탁경현에 초점을 맞춰 위령비를 세우려는 쪽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지만, 그를 사천시에 소개한 일본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52) 씨에 대해서는 전국지들이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내 대조를 이뤘다.

그러는 새에 외국 언론이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 눈길을 끌었다. '타리페'라는 블로거(http://blog.daum.net/superjey)가 지난 11일 발행한 '해외 언론이 본 가미카제 위령비'라는 포스트를 보면 미국의 <CNN>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이 이 문제를 다뤘는데, 미묘한 시각차를 보였다.

<CNN>은 비교적 사건의 동정 묘사에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도 정부 방침과 반대되는 사천시 행정을 통해 한국사회의 아이러니를 비꼬고 있다. 반면 <아사히 신문>은 한국의 좌·우파가 모두 위령비 건립에 반대한다는 팩트를 전달하면서도 가해자인 일본 제국주의 문제는 뺀 채 '연합국 측에서 보면 (탁경현도) 가해자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경남일보> 칼럼에서 밝혔듯이 '인간 탁경현' 자체로는 불운한 삶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가지는 역사적 무게를 도외시한 채 '불운'에만 포커스를 맞춰 추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을 짚어 나가는데 도내 언론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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