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6) 고향을 떠나 창원으로 온 사람들

정부, 전국에 기계공고 정해 인재 양성
취업 등 혜택 많아 가난한 수제들 몰려
실습, 첫 직장으로 청년 사업체 유입돼

개발 초기 공장들 사이 농촌 정취 남아
바쁜 일상에 각자 문화차 느낄 새 없어

원주민들의 한이 서린 땅 위에 다른 이들의 삶이 움텄다. 가난했지만 미래를 꿈꾸던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학생들,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일부 타 도시 노동자들이 창원에 모여들었다. 공단 구석구석에서 한국 산업화를 뒷받침한 주역들이다. 창원공단은 이들에게 하나의 활주로였다. 사람들이 집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못다 한 배움의 길을 좇는 동안 텅 빈 땅이었던 창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공단 도시 창원'은 이렇듯 원주민들의 희생과 출향인들의 헌신으로 주조된 곳이다.

◇기계공고로 간 인재들 = 1974년 산업기지개발구역 고시 이후 원주민들의 땅을 밀어내고 들어선 창원공단, 그 안의 공장들을 메운 사람들은 전국 기계공고에서 훈련받고 취업한 기능공들이었다. 1973년 4월 정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금오공고(경북 구미), 부산한독직업학교, 성동공고(서울), 광주공고(전남 광주)를 정밀가공기능사 양성학교로 지정했고, 그 뒤 기계공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79년까지 기계공고는 전국 19곳으로 늘어났다. 중공업을 육성하기로 한 이상 산업의 실핏줄이 될 인재를 키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계공고들은 대부분 학비 면제 혜택이 있었고, 기숙사까지 저렴하게 제공했다. 공부를 잘했는데도 인문계 고등학교, 혹은 대학까지 진학할 학비가 없어 좌절했던 전국 중학생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강원도 평창 출신 김규동(62) 시인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김 시인은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을 하고 상도 자주 탔는데, 고등학교 갈 학비는커녕 졸업사진을 찍을 돈도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 했다"라며 "그때 선생님이 성적 우수 전형으로 갈 수 있는 부산기계공고를 추천해줬다"라고 회상했다. 
 

김규동(62) 시인이 창원 구산면 자택에서 창원에 첫 입성했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김규동 시인이 창원 구산면 자택에서 창원에 첫 입성했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김 시인의 부산기계공고 한 해 선배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는 경북 청송 시골 마을 출신이다. 원래 꿈은 선생님이었고, 대구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해 대학까지 가고 싶었지만 자취까지 할 형편이 닿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만든 데다 취직도 잘 된다는 부산기계공고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시 부산기계공고 시험 일정이 한 달쯤 빨라서, 일단 쳐보고 안되면 연합고사를 칠 계획이었는데 덜컥 붙었다"라며 " 동문이 전국 각지에서 다 모였는데 하나같이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었다"라고 말했다. 

1977년에는 창원에도 기계공고가 만들어졌다. 김 시인은 "제가 3학년일 때였는데, 당시 우리 학교(부산기계공고)에서 실습 장비며 테이블·쓰레기통 등 각종 집기를 만들어서 가져다준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경북 봉화 출신인 김규련(60) 창원상공회의소 경남지식재산센터장은 중학교 때 창녕으로 이주해 창원기계공고로 진학했다. 그는 "당시 전국 단위로 모집했었어도 마산이 유명했지, 창원은 인지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주로 경남 학생들이 많이 왔다"라고 회상했다.
 

삼성중공업은 1995년 8월 18일 창원공장(현 볼보그룹코리아 창원공장)에서 선박용 대형엔진공장과 450t급 대형크레인이 설비된 기계플랜트전용부두 준공식을 열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삼성중공업은 1995년 8월 18일 창원공장(현 HSD엔진)에서 선박용 대형엔진공장과 450t급 대형크레인이 설비된 기계플랜트전용부두 준공식을 열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첫발을 디디다 =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온 신촌동 34번지는 허허벌판에 우뚝 솟은 공장뿐이었다. 1976년 처음 조성한 공단은 황량한 벌판이었고, 거침없이 달려온 바닷바람만이 매섭게 나를 맞았다. 공장과 회사조차 구분하지 못하던 까까머리 실습생이 처음 본 공장은 거대한 괴물이었다."(김규동 <내 인생의 활주로> 중) 

김규동 시인은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한 1978년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삼성중공업이 창원공장(현 볼보그룹코리아 창원공장)을 세운 첫해였다. 그는 "지금도 크지만, 당시에는 단일 공장으로는 제일 컸다"라며 "처음 봤을 때는 비행기 만드는 곳인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학교 동기 900여 명 중 함께 입사한 사람만 120명이다. 이는 당시 삼성중공업이 창원기계공고와 결연하고 유능한 학생을 미리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실습 장비를 대주거나 졸업 전에 일본어 교육을 하는 등 신경을 쏟다가, 우수한 학생들을 우선 추천받았다. 김 시인은 "다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학교로 돌아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왔다"라며 "당시 공고 졸업생들이 잘 팔리던 때라 실제로 2번이든 3번이든 학교에서 취직시켜준 사례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경남 도내에서도 많은 공고 학생이 창원에 입성했다. 이들이 본 첫 풍경은 아직 아무것도 없는 농촌에 공장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모습이었다. 

강천(60) 동양코어 대표는 삼천포공고 3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효성기계공업(현 KR모터스)에 취직했다. 당시 실습생으로 시작했어도, 취업 사실만 증명하면 졸업은 문제없었다. 강 대표는 "효성기계공업에서 삼미종합특수강(현 현대비앤지스틸) 가는 길 아래쪽은 그때만 해도 전부 필지만 정리된 공터였다"라며 "대중교통이 소답동 말고 구석구석으로는 가지 않으니까 어딜 가든 큰맘을 먹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번은 정동에 살던 지인 집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다"라며 "버스를 타려면 연덕 삼거리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밤이 되니까 방향 감각을 상실해서 반대쪽 대림자동차(현 DL모터스)까지 갔다 되돌아온 일이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진주기계공고 출신 성남주(61) 작가는 1979년 11월 대림자동차에 취업했는데 이듬해 본사로 발령 나면서 난생처음 창원에 왔다. 성 작가는 "당시 넓은 기지대로와 사화 비행기 활주로가 기억에 남는다"라며 "지금 LG전자가 있는 정동도 촌락이었고 항상 일 마치면 그쪽으로 막걸리를 먹으러 갔었다"라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창원제2공장(현 볼보그룹코리아 창원공장)의 1995년 8월 당시 모습./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삼성중공업 창원제2공장(현 HSD엔진)의 1995년 8월 당시 모습./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부딪히며 섞였던 시절들 = 전국 각지의 공고 졸업생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문화나 말투가 낯설기도 했다. 성 작가는 "서울 친구들이 참 조용하더라 싶더니,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사투리 쓰는 걸 듣고 '싸움 거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라며 "우리가 툭툭 던지는 이야기를 시비 건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지역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뒤늦게 실감한 일도 있다. "친하게 지내던 전라도 친구가 있었는데, 회사가 갈린 뒤에도 계모임까지 같이했지. 그런데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이 친구가 '이제 너희 나 무시하지 마라'고 이야기해서 깜짝 놀랐지. 그냥 알던 사람이었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꽤 친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무척 섭섭하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낯선 경상도 땅에 와서 평소 억눌렸던 점이 있었겠다 싶어."

당시 야근·특근을 반복하던 공장 분위기에서 지역색에 따른 충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김규동 시인은 "부산기계공고처럼 전국에서 모여든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이미 타지 친구들과 기숙사 생활을 3년 동안 해봤기 때문에 낯선 문화에 익숙한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출신 학교별로 알력이 있기도 했다. 성 작가는 "요즘은 가르쳐주려고 해도 잘 배우려 하지 않지만, 당시 기능공들은 새 장비나 기술을 접할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NC 선반이라는 장비가 공장에 있었는데, 부산기계공고 출신 라인 조장이 자기 후배들에게만 장비 자리를 비워줘서 충돌했던 일이 있다"라며 "공장에서 출신 학교끼리 뭉치고 챙겨주는 분위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아직 '창원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덜하던 시기 이야기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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