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3) 귀곡·귀현리 원주민 생활상

1977년 이전 243가구 옹기종기
배로 주로 왕래한 '육지 위 섬'
전기·도로 기반시설 적었지만
땅 비옥해 주민 대부분 농사
가포와 함께 피서지로도 인기

창원은 오랫동안 순박한 농부들의 영토였다. 넓고 기름진 땅 곳곳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고, 상당수는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지만 산과 들, 바다가 낳은 것들로 풍요로웠다. 논밭마다 풍기던 두엄 내음, 바다에 비친 시내 불빛, 아무 곳에나 누우면 쏟아지던 별빛. 창원 원주민들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고향 풍경이다. 창원공단의 기억은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귀 해안도로를 모르는 창원 사람은 드물다. 멋들어진 카페들이 마창대교를 끼고 늘어섰고, 주말마다 주차 차량으로 장사진을 이루는 곳. 누구나 한 번쯤 찾은 적이 있겠지만, 지명 유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부근은 해안가를 따라 창원군 웅남면 귀현·귀곡·귀산리가 있던 곳이었다. '삼귀'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이 중 마산만과 마주 보던 귀곡·귀현리는 국가산업단지 터로 편입되며 사라졌다. 당시에는 현대양행 공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두산에너빌리티가 있는 장소다.

▲ 창원국가산단 터 조성으로 귀현·귀곡리가 철거된 뒤, 인근 삼귀동에 일부 남은 포도단지의 1991년 8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창원국가산단 터 조성으로 귀현·귀곡리가 철거된 뒤, 인근 삼귀동에 일부 남은 포도단지의 1991년 8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잊을 수 없는 고향 풍경 = "저녁 무렵, 바다 건너 마산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둑어둑한 마을과 대비되는 마산시 불빛이 한눈에 들어오죠. 그 아래 바다가 주황색으로 빛나는 광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새벽녘 산에 올라 같은 곳을 보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달 그림자가 바다에 반짝이면 꼭 빨려 들어갈 것 같거든요. 우리는 '은파'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지요."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두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았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두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백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귀곡리는 창원군(옛 창원시 지역) 안에서도 상당히 큰 마을이었고, 조금 위쪽에 있었던 귀현리는 그 절반에 못 미쳤다. 때문에 사람들은 귀곡리를 '본동네'라고 불렀다. 두 마을을 합쳐 '구실'이라고도 했다.

▲ 1976년 7월 국가산단 터 조성 직전 귀곡리 전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1976년 7월 국가산단 터 조성 직전 귀곡리 전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창원출장소사>는 현대양행 공장 터 조성 직전 귀곡리에 180가구 873명, 귀현리에 63가구 334명이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곡 출신 고경수(71)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웅남면사무소(당시 창곡리 소재)에서 호적 업무를 봤었는데, 귀곡리 호적표가 가장 길었다"라고 회상했다. 그 즈음에는 귀곡 한 동네 학생 숫자가 웬만한 1개 면 전체보다 많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경수 씨 친형 고익수(76) 씨는 귀곡에 사람이 많았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옆동네 진해에 해군 공창(현 해군 군수사령부 정비창)이 있어 군무원이 많이 살았던 점, 둘째는 1959년 태풍 '사라' 이후 거제·통영 사람이 많이 건너왔던 영향이다. 익수 씨는 "거제 해안가에 살던 주민들이 태풍으로 침수 피해를 겪고 '도저히 못살겠다'며 귀곡으로 왔는데, 우리는 '물 아래 사람'으로 불렀다"라고 말했다.

▲ 지난달 3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만난 김창근(왼쪽), 고경수 씨. /이창우 기자
▲ 지난달 3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만난 김창근(왼쪽), 고경수 씨. /이창우 기자

◇'섬 아닌 섬' = 자연마을로는 인구가 많은 편이었지만 교통은 무척 불편했다. 마창대교는 당연히 없었던 때라, 육로로 마산에 가려면 산을 넘고 봉암다리를 건너야 했다. 마산 남성동에서 귀현·귀곡·용호·귀산리까지 왕복하는 '웅남호'라는 정기선이 다녔던 까닭이다. 배편을 이용하는 고객 중에는 학생도 많았다. 이곳에는 중·고등학교가 없어 삼귀국민학교(귀곡 소재) 졸업생은 모두 마산으로 진학했다. 귀현 출신 고영조(76) 시인은 "당시 중학교 등록금이 180원이었고, 웅남호 뱃삯은 1원 정도 했다"라며 "하도 배가 고프다 보니, 표를 부둣가에서 파는 빵하고 바꿔 먹고는 배 뒤에 몰래 밧줄을 내려 매달려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어쩌다 과외수업 때문에 오후 5시 30분 마지막 배편을 놓치면 어쩔 수 없이 산길을 걸었다. 김창근(71) 씨는 그럴 때면, 호주머니에 담배와 성냥을 꼭 챙겨 다녔다. 산짐승들이 화약냄새를 싫어한다는 말을 들어서다. 김 씨는 "덕분에 담배도 일찍 배웠다"라며 웃었다.

사실상 섬과 같은 곳이다 보니, 기반 시설을 깔기 어려웠다. 전기도 안 들어왔고, 자동차가 다닐 도로도 없었다. 익수 씨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68년 돌아오면서 전축을 하나 사 왔는데, 한 번 틀어 볼 수가 없었다"라며 아쉬워했다. 동생 고미애(66) 씨는 "책 펴고 공부할라치면 호롱불을 켤 수밖에 없었고, 촛불도 사치였다"라고 거들었다.

내내 조용하다가도, 이따금 시가지나 인근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창근 씨는 "신마산 화력발전소가 수시로 내뿜는 증기 배출 소리는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면서도 "시계가 없는 집이 많았는데, 진해 해군 공창에서 하루 일과에 따라 내뿜는 기적 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 지난달 3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만난 고미애(왼쪽), 고익수(가운데) 씨. /이창우 기자
▲ 지난달 3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만난 고미애(왼쪽), 고익수(가운데) 씨. /이창우 기자

◇귀하고 풍요로운 땅 = 문명의 이기 대신, 풍요로운 자연 덕을 보며 살았다. 귀현·귀곡 이름부터 귀할 귀(貴) 자가 들어 있다. 귀현리에는 금광·동광 등 광산이 있어 일제강점기까지는 채굴 활동이 활발했지만, 광복 후에는 아이들의 담력 시험 장소가 됐다. 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는데, 농지의 1할 정도는 전국에서 유명한 포도 재배지였다. 처음 포도를 심은 사람은 익수, 경수, 미애 씨 부친인 고 고종효 씨다. 거제 포도농장에서 가져온 묘목을 귀현에 심고, 복음농업실수학교(창신학교 병설)에서 배운 지식으로 정성스레 길렀다. 경수 씨는 "아버지는 10여 년 연구 끝에 포도농사가 성공하자, 마을 사람들에게 묘목을 나눠줬다"라며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 관련 서적으로 독서회를 하다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분인 만큼,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신념이셨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마을은 포도밭으로 뒤덮였다.

포도가 익는 8월 중순이면, 달큼한 포도향이 온동네를 메웠다. 마산 사람들도 주말이면 웅남호를 탔다. 고 시인은 "적현리(현 창원국가산단 적현단지)와 귀현리 사이 백사장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가포해수욕장과 함께 마산에서 갈 만한 피서지였다"라며 "해수욕을 가기 전에 꼭 구실에 와서 포도를 먹고 가곤 했다"라고 말했다. 도시 피서객들을 구경하는 일은, 촌 아이들이 누리는 낙이었다.

▲ 지난 5월 27일 창원시 진해구 경남문학관에서 만난 고영조 시인. /강찬구 기자
▲ 지난 5월 27일 창원시 진해구 경남문학관에서 만난 고영조 시인. /강찬구 기자

일부 마을 사람들은 해산물 채취를 부업으로 삼았다. 간조 때면 조개·바지락·꼬막·게 등이 갯벌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귀현·귀곡 사람들은 대여섯 살만 되면 헤엄을 능숙하게 쳤는데, 해안가와 가까운 아랫마을 아이들은 '불배(멸치를 현장에서 삶는 어선)'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곧 멸치잡이 배가 온다는 뜻이래서다. 익수 씨는 "배까지 헤엄쳐 가서 올라타면 멸치를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 당시 뱃사람들은 제지하지 않았다"라며 "어차피 헤엄쳐 돌아가야 하니, 현장에서 먹는 몫 외에는 더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포 해안이나 진해 용원 멸치어장까지 된장·풋고추를 들고 가서 멸치와 교환하기도 했다. 뱃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다음에는 된장을 더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1977년까지의 귀곡·귀현리의 일상은 이렇듯 평화로웠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irondumy@idomin.com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