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5) 창원대종과 창원유허비 이야기

창원상의, 삼원회 건의 받아 건립 추진
지역 각계에서 뜻 보태 총 7억 원 모여

대종에 삼원지역·공단 상징 새겨넣고
유허비 창원출신 설창수·윤판기 참여
마땅한 석재·제작소 찾으러 전국 돌아
"원주민 기억하고 시민에 희망 되길"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창원대종·유허비, 아픔의 역사 담겨 = 도시에는 그곳의 정체성을 담은 유명한 상징물이 있게 마련이다. '63빌딩'처럼 선진국 진입 열망을 드러낸 마천루, '창원대로'처럼 계획도시 창원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간시설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도시 발전 과정의 이면이 함축된 상징물도 있다. 창원시 성산구 용지호수 옆 야트막한 언덕에 선 '창원대종'과 '창원유허비'가 바로 그런 사례다. 시민이 자주 찾는 휴식 공간 가까이에 있고 광복절, 12월 31일 타종 행사도 하는 곳이지만, 윗세대가 어떤 마음으로 두 상징물을 세웠는지 아는 창원시민은 많지 않다. 

완성된 창원대종이 1993년 12월 20일 현종식 당일 창원대종각에 걸린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완성된 창원대종이 1993년 12월 20일 현종식 당일 창원대종각에 걸린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400여 년 아득히 닦아온 조상들의 행적과 흔적이 소멸되는 비운의 절연(絶緣)을 통탄하며 이제 우리 조상들의 손때 묻은 돌 하나 만져볼 수 없고 땀에 젖은 흙 한 줌도 만져볼 수 없게 되었으니…언제라도 이 땅에 찾아오셔서 옛 벗님들과 한자리에 만나 당신들의 영(靈)을 달래며 지난날 있었던 즐거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표적(表迹) 하나라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숙원이므로 회장님의 협조를 바랍니다." (<창원대종 및 유허비 건립보고서> 중 '삼원회 건의문')

두 상징물 건립은 신도시 창원의 모든 주체가 마음을 모아 원주민 희생을 위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단은 원주민 단체 삼원회가 1990년 창원상공회의소(이하 창원상의)에 한 통의 건의문을 낸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의 내용은 신도시 거름이 된 원주민의 희생이 잊히지 않도록, 새 창원 어딘가에 새겨달라는 취지였다. 창원상의는 공단 조성에 앞장섰던 각 기관에 의견을 물었고, 이들이 수락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원 상징물 건립이 진행됐다. 지역 상공회의소가 상공계 밖 지역 의견도 일정 부분 수렴했던 지방자치 시작 전 시기의 단면이기도 하다.

◇창원시민 모두 함께한 상징물 제작 = 상징물 건립에 필요한 재원으로 총 7억 원이 모였다. 창원시가 3억 원, 수자원공사가 2억 원, 동남산업단지관리공단(현 산업단지공단 경남지역본부)이 1억 원, 창원상의가 1억 원을 출연했다. 모두 원주민들의 희생에 책임이 있는 곳이다. 

곧 '창원 상징물 및 유적기념탑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고 이정석 당시 창원상의 회장이 초대 위원장을 맡았고, 고문·자문위원·위원에 100명 넘는 사람이 이름을 올렸다. 보고서를 보면 국회의원, 시의원, 상공인, 웅남·창원·상남 3개 면 원주민, 각종 사회단체, 언론계, 학계 전문가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원대종각 건축 공사 모습. /창원대종 및 유허비 건립보고서
창원대종각 건축 공사 모습. /창원대종 및 유허비 건립보고서

이정석 회장에 이어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창식(87) 전 창원상의 회장은 회고록에서 "상징물과 탑비라는 단어가 들어간 추진위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처음에는 상징물과 기념탑, 비석 3가지를 세우기로 했는데, 7억 원으로는 모자랐다"며 "전체추진위 회의를 거쳐 창원대종과 유허비 두 개만 세우는 것으로 합의했다"라고 말했다.

창원대종과 유허비 제작에는 각계 대표 격인 추진위뿐 아니라 일반 창원시민도 참여했다. 추진위는 1990년 9월 28일 <경남신문>, <경남매일>에 창원대종 표면 문양 디자인, 창원 상징물 기념비 모형 디자인 공고를 했다. 3개월 동안 17명이 32점을 응모했고, 당선작에는 강경봉(고성)·김도형(마산) 씨 공동작품이 뽑혔다. 이들 디자인이 그대로 채용되진 않았지만, 종 중앙의 꽃과 이를 둘러싼 톱니 문양 등은 완성품에도 비슷하게 접목됐다. 창원이라는 고장과 기계공단을 상징하는 기호다. 1993년 완공된 창원대종은 상대 문양에 구름, 하대 문양에 창원시 시목·시조인 소나무·까치를 넣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다만, 유허비 모형디자인은 건립에 적합한 모양이 없어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당시 공모에서는 모두 당선작 1점, 우수작 1점, 가작 11점이 수상했다.

◇종 보고 돌 찾으러 방방곡곡에 = 추진위가 건립 사업의 큰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동안 실무를 맡은 기관은 창원상의였다. 기금을 보탠 기관 중 사업에 별도 인력을 투입할 여유가 있었고, 직원 중 옛 창원 출신 원주민이 많아 추진 의지도 강해서다. 대종 관련 자료를 모아 제작사를 섭외하고, 유허비에 쓸 돌을 구하는 등 품이 드는 일을 도맡아 했다. 

창원유허비 설치 공사 모습./창원대종 및 유허비 건립보고서
창원유허비 설치 공사 모습./창원대종 및 유허비 건립보고서

창원대종 높이는 창원·상남·웅남 3개 면을 뜻하는 3.3m로 정해졌고, 무게는 약 12.5t에 달했는데 이만한 종을 제작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흔치 않았다. 당시 실무자였던 손무곤(62) 창원상의 상근부회장은 "경주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등 전국 사찰 범종을 답사하며 자료를 모았고, 충북 진천 성종사에 제조를 맡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성종사는 부산 홍종사와 함께 국내 범종 제조업계를 양분하는 회사다. 제작 감수는 당시 금속 음향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였던 염영하 서울대 교수, 배성인 창원대 교수가 맡았다.

손 부회장은 유허비에 쓸 돌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석재상을 수소문하다 보니 큰 산 밑에 자연석을 무더기로 모아놓은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강원도까지 가서 찾는 중에 마음에 드는 돌이 딱 하나 있었는데, 63빌딩 표지석으로 세우려고 구두 계약된 돌이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창원기계공단 설립 과정에서 희생된 원주민들 사정, 유허비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마침내 돌을 구할 수 있었죠."

"솔숲 먼당에 자리한 사향(思鄕)의 쇠북소리가 울려번지는 조국강산에 지령인걸(地靈人傑)을 가꾸어 나랄 도우리라." (<창원유허비문> 중)

9월 30일 손무곤(62) 창원상의 상근부회장이 창원 상징물 제작 관련 일화를 밝히고 있다. /이창우 기자
9월 30일 손무곤(62) 창원상의 상근부회장이 창원 상징물 제작 관련 일화를 밝히고 있다. /이창우 기자

유허비문은 창원에서 태어나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고 설창수 선생이 지었다. 같은 소답동 출신이었던 박창식 전 회장이 거듭 부탁한 결실이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썼지만, 역시 창원유허비문은 창원 사람이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비문 글씨도 창원 출신인 고 윤판기 서예가가 썼다. 

박 전 회장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정든 땅을 내주고 이젠 고혼(孤魂)이 됐을 많은 창원 원주민이 저승에서라도 종소리를 들으며, 물장구치고 놀았던 추억, 이웃 간 정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또 지금 창원시민은 이런 옛 창원사람들을 회억(回憶)하면서 삶에 희망과 용기를 얻기 바란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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