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7) 창원과 함께 성장한 사람들

열악한 조건에도 모두 미래 향해 분투
처우 개선따라 가세 높이며 창원 정착

향학열 강해 기술 습득과 대학 진학 노력
기능 분야 "내가 최고: 자부심 갖기도
공단과 함께 성장한 인연 아직 이어져

원주민들의 한이 서린 땅 위에 다른 이들의 삶이 움텄다. 가난했지만 미래를 꿈꾸던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학생들,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일부 타 도시 노동자들이 창원에 모여들었다. 공단 구석구석에서 한국 산업화를 뒷받침한 주역들이다. 창원공단은 이들에게 하나의 활주로였다. 사람들이 집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못다 한 배움의 길을 좇는 동안 텅 빈 땅이었던 창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공단 도시 창원'은 이렇듯 원주민들의 희생과 출향인들의 헌신으로 주조된 곳이다.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졸업생들을 포함해 각지에서 창원으로 온 노동자들은 산업단지의 발전에 발맞춰 삶의 뿌리를 내려갔다. 노동자들은 산단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고 꿈을 키워나갔으며 '창원 사람'이 돼 갔다. 대우중공업 노동자였던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가 말하듯, 사람들이 입 모아 기억하는 '공터' 창원은 그렇게 강산이 네 번 바뀌고 지금 모습이 됐다.

40여 년의 세월, '초년병'들은 손자를 보는 나이가 됐다. 어떤 사람은 문학을 하고, 어떤 이는 창원에서 기업을 운영하게 됐다. 판이하게 바뀐 그들의 모습은 창원에서 흘린 땀과 펼쳐나간 꿈을 과정으로 품고 있다. 새 터에 새 직장을 잡은 기계공고 졸업생들은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꿈꾸거나 각자 가진 꿈을 향해 나아갔다.

창원공단의 2015년 모습. 초기에는 대기업 공장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다가 이내 중소기업들이 빼곡히 채워 나갔다. 이들 중소기업은 상당수가 공장 노동자 출신들이 창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창원공단의 2015년 모습. 초기에는 대기업 공장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다가 이내 중소기업들이 빼곡히 채워 나갔다. 이들 중소기업 상당수는 공장 노동자 출신들이 창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공장을 따라 살림도 쑥쑥 자라나던 = 공단의 성장사는 곧 이들의 성장사다. 부산기계공고를 나와 1978년에 동기 120명과 함께 삼성중공업에 취직한 김규동(62) 시인은 당시의 치열했던 직장생활을 회고했다. 

"오후 8~9시까지 일하는 건 예사였지. '대망의 1980년대가 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 당시 정부 구호가 그랬어요. 주 52시간이 뭡니까. 잔업 특근하고 철야해서 다음 날 오전까지 하고…. 줄 잘 서서 좋은 회사 들어와서 내가 열심히 한다, 그 생각만 했어요."

'기술'을 얻으려는 노력도 치열했다. 김 시인은 말을 이어갔다.

"기술을 대개 일본서 들여오다 보니, 현장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라 익히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선후배고 반장이고 간에 기술을 잘 안 가르쳐줬지요. '쟤가 가져가면 내 자리가 없어진다'는 거죠. 그러면 선배들에게 잘 보여서 뭐라도 배우려고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하는 요령도 부리곤 했죠."

성남주 작가
성남주 작가

진주기계공고를 나와 대림자동차 취직으로 창원에 온 성남주(61) 작가는 말했다.

"쉬라고 하면 상당히 불안하기도 해서 일 더 안 시켜준다고 따질 정도였죠. 당시 부산기계공고에는 다른 공고엔 없던 CNC(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기계)가 있어서 출신자들이 그 기술을 배워서 자기네들끼리만 나누곤 했는데, 부기공 출신이던 우리 조장이 자기 직원인 제게도 가르쳐주질 않아 서운하기도 했죠. 결국 나중에 저 스스로 그걸 '마스터'했습니다."

임금은 가파르게 올랐고 생활 수준도 지속해서 나아졌다. 삼천포공고를 졸업하고 실습차 창원에 첫발을 들인 강천(60) 동양코어 대표는 해가 갈수록 높아지던 급여를 설명했다. 

"1980년 실습 갔을 때 첫 월급이 6만 7500원, 5년 뒤 통일중공업 들어가니까 월급이 20만 얼마였어요. 이후 나라도 계속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창원공단도 계속 컸고 또 노사분규, 임금 투쟁도 1987~1988년(노동자 대투쟁)에 엄청 심하게 있기도 했지요. 잠시 서울로 올라가 일하다가 1989년 창원에 다시 와서 중소기업에 취직했는데 월급 100만 원을 주더라고요." 

김 시인은 말했다. "삼성서 처음에 콘센트 막사(반달형 가건물)에 살다가 셋방 살고…. 나중엔 아파트로 갔지요. 재형저축 3년, 52만 원 정도 모아서 결혼생활도 시작했습니다. 돈 버는 재미도 조금씩 생기고, 집 사고 평수 늘려가고 이런 것들이 재밌었어요."

◇공장 불이 꺼지면 독서등이 켜지고 = 당시 기계공고 졸업자들은 학창 시절을 "공부는 괜찮게 했는데, 형편이 안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만큼 당시 창원공단에 온 기계공고 출신 노동자들은 향학열이 강했다. 회사에 다니며, 또는 그만두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강천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에 가기로 결심한 계기를 떠올렸다. 

"효성기계공업(현 KR모터스)에 6개월 정도 다녔어요. 회사에 중학교 동창 여사원이 한 명 있었지요. 마산여상을 나왔는데 사무실에서 일을 하더라고. 나는 현장서 기름복 입고 뽈뽈 기는데, 서류 들고 와서 현장에서 끼적끼적하고 그러면 뭔가 기분 나쁜 거야! 그래서 회사 그만둬 버리고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마산에서 대학에 다니게 됐죠." 

1980년 함께 창원에 첫발을 디딘 성남주 작가의 동기들은 상당수가 회사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성 작가 말이다. 

"월급 많지 숙소 있지,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어느 순간 안 되겠는 거야. 하나둘 공부를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동기 98명 중 60명 이상이 전문대나 4년제 대학에 갔어요. 회사(대림자동차)에서 난리가 났죠. 저녁에 잔업을 좀 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공장장이 학교 보내지 마라고 하게 되죠. 그래도 매주 토요일 되면 '과장님 조퇴 좀 시켜주세요' 하고 안 해주면 월담을 하는 거죠. 그렇게 다음 주 월요일 시말서 쓰고…. 저는 한 40장쯤 썼을 거예요." 

성 작가는 계속 학업을 이어 나가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창원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김규동 시인도 현재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가 된 창원기능대학에 1988년 진학해 주경야독했다. 

"당시 기능대는 아무나 들어가는 데가 아냐. 기능사 1급 가지고 현장 경험도 1년 있어야 했어요. 용접 1급을 따서 들어가 야간에 공부했죠. 저 포함해 기능대학 출신들은 자부심이 있어요. 기능에선 최고죠. 제가 그래서 말하죠. 나는 조국 근대화의 적자다!"

강천 대표
강천 대표

◇산업발전이 삶에 남긴 흔적 각별해 = 한국 기계공업 태동과 함께한 기억은 이때의 인연과 창원을 각별하게 만들었다. 황병득 대표는 삼성중공업 입사 동기들과 여전히 활발히 교류한다. 

"1977년 8월 17일. 우리 입사일입니다. 매해 이날 만나요. 마산·부산·태백 기계공고 출신 서른대여섯 명이죠.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올해는 중국에서 사업하는 친구도 참석했습니다. 지금 사업하는 사람들, 또 주민등록이 늦게 돼서 정년퇴직하고도 아직 삼성중공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어요. 상당히 의지가 되죠. 공고 출신 노동자들의 역할, 창원에서 컸죠. 처음에 대기업들 공장 들어섰을 때 듬성듬성했지만, 이후 공단을 채운 중소기업들, 알기론 거의 90%가 창원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 세운 회사입니다. 첨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촌에 어떻게 회사가 설까' 했지만, 지금 대한민국 대표 공단이 됐다는 데 가슴 뿌듯합니다." 

성남주 작가는 창원에서 느끼는 특별한 '기질'을 산업 건설의 역사에서 찾는다.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 경쟁하던 그런 문화에서 자기 계발의 문화가 세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는 선생님이 책 쓰는 강좌를 여시는데, 창원은 항상 꽉 찬다는 겁니다. 더 큰 도시인 대구나 부산만 해도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창원은 '하고재비'들이 많은 도시입니다. 그게 창원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요." 

/강찬구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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