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0) 이주 택지로 간 원주민들

보상 시기와 수준 따라 운명 천차만별
이주 택지, 생활과 생계 조건 고려 없어
산단 노동자 들일 셋방 지어 호구지책
'철거반 난입' 빡빡한 규제에 쉽지 않아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창원군은 '토박이'의 땅이었다. 일제강점기와 1960~19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쭈욱 농촌으로 남아 있었고, 많은 자연마을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산단 조성으로 보금자리와 농토를 잃었으니 창원에 남으려면 삶의 방식과 호구지책을 모두 바꾸어야 했다. 상당수는 이전까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농업을 대체할만한 것을 쉬이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원주민이 "날품팔이로 연명했다"고 표현하는 당시의 사정처럼 일용직 육체노동으로 생업을 이어갔다.

물론 이주 대상이 된 경상남도 창원지구출장소 관할 지역 112.38㎢ 내 원주민 8500여 명의 처지를 하나로 이야기하긴 힘들다. 토지 수용 시기에 따라 보상액이 달랐고, 보상액을 낮게 쳐 주던 시기였더라도 기존 재산 정도에 따라 보상 이후 남는 재산이 달랐기 때문이다.

산단은 제1단지부터 차룡단지까지 20년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구획을 나눠 조성됐기에 가지고 있던 집과 논밭이 각기 다른 시기에 수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가음정동의 강장순(61) 전 창원시의원은 "이 쪽은 창원대로가 만들어질 때 일찌감치 수용됐지만 남단의 논밭만 일찍 건네줬고 사람들이 살던 마을은 한참 뒤에 철거됐다"고 말했다. 

실제 가음정의 경우 주민들의 이주는 1999년에야 추진돼 2010년에 완료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주민들은 보상가와 시기, 주택과 농지의 수용 시기, 기존 자산의 수준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여기에 속하지 못 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용과 보상은 어디까지나 '토지'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창원군 지역에 살던 소작인들은 똑같이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약간의 이주 지원금 외에는 보상받을 것이 없었고, 하릴없이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서익진(67) 경남대 교수는 당시 원주민들의 갈린 '운명'에 대해 말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볼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몇 가지 대표적인 전형을 꼽자면, 아무것도 없이 소작농으로 살다가 일구던 땅이 없어지니 또 다른 농촌으로 가서 소작을 붙이거나 마산 같은 도시로 가서 노무자가 된 사람들이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나마 택지라도 받아서 집을 올리고 살게 된 사람들, 나중에 보상을 아주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다른 한 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2015년 5월의 창원시 봉곡동 모습. 반듯하게 구획지어진 구역 안에 균일한 크기의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봉곡동도 원래는 논밭이 대부분이었으나 원주민 이주를 위한 택지로 지정돼 단독주택 단지가 됐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2015년 5월의 창원시 봉곡동 모습. 반듯하게 구획지어진 구역 안에 균일한 크기의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봉곡동도 원래는 논밭이 대부분이었으나 원주민 이주를 위한 택지로 지정돼 단독주택 단지가 됐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집터는 반듯한데 살 대책은 엉망 = 현재 창원에 남은 원주민 대다수는 당시 택지를 분양받아 이주단지에서 삶을 꾸려온 사람들이다. <창원출장소사>는 '출장소는 1977년 3월, 11억여 원(공사비 6억 6800만 원·보상비 4억5400만 원)을 들여 1차로 웅남1동 두대리에 7월 말까지 8만 8000평을 완공하여 주택 470동과 공공시설을 건립, 삼귀·귀곡 등의 이주민들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철거민에게 60평 내외의 택지를 분양하고, 자유 이주자에 한해서는 별도 이주 정착비 80만 원을 지급하기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출장소는 원주민들을 자연 마을별로 퇴촌·사림·중앙·사파·대방·지귀·봉곡·성주·두대·명서·팔용동 등에 단독주택지를 조성해 택지를 분양하고 이주를 추진한다.

이주 택지 단지는 공터였다. 살 집도 없었거니와 근처에서 먹고살 방법도 없었다. 정부가 이주 원주민에게 나름의 혜택을 줬지만 사실상 실효성 없는 대책들이었다. 

이시우(62) 삼원회 사무국장은 말했다. "1974년 4월 1일 이전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3평(9.9㎡)짜리 상가 분양권을 줬습니다. 그것도 소지가(수용 전 땅값)가 아닌 일반 분양가로 돈을 내야 했죠. 그러니까 돈이 있으면 그 상가를 사서 장사를 하라는 겁니다. 원주민들이 대부분 공시지가보다 못한 돈으로 보상받았는데 상가를 준다 해도 그대로 인수하기도 힘들고, 장사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게다가 당시만 해도 주변에 전부 이주해온 원주민만 살았습니다. 상권이 형성돼 있을 리가 없었죠. 그러니까 상가 분양권 받은 사람 80~90%가 그걸 팔고 나갔습니다."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삼원회관에서 만난 삼원회 박흥실 이사장. /강찬구 기자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삼원회관에서 만난 삼원회 박흥실 이사장. /강찬구 기자

박흥실(67) 삼원회 이사장도 덧붙였다. "당시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은 완전히 분리돼 있었고 교통도 열악해서 뭘 사거나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택지에 장사를 좀 하게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공인중개사 이기찬(67) 씨는 관련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택지를 1종 전용주거지역으로 묶어놨어요. 저층, 2층 정도 주택만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근린 상가'가 하나도 없으니까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람에 결국 나중엔, 상가가 들어설 수 없는 곳인데 창원시가 도로 주변 중심으로 규제를 풀어줬죠." 

◇공장노동자 월세 받기 '특공작전' = 원주민들은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우악스러운 정부 규제 속에서도 숨 쉴 구멍을 찾아야 했다. 원주민들은 이주단지에 정착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모두 '블록 집', '단칸방' 이야기를 했다. 

서익진 교수는 말했다. "산업단지 조성은 그야말로 '빅 푸시'였습니다. 공장들이 갑자기 막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니까 기존 환경이 이들을 소화해 내지 못했어요. 배후단지도 다 조성이 안 됐을 때는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들이 살 곳이 없었던 거지요. 마산에 방을 빌려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마산 주거비가 올라갔고, 창원 원주민들의 집에 노동자가 세를 사는 형태가 나오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 '임대 사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박흥실 이사장이 당시를 설명했다. "옛날 두대동 생각이 나는데, 방세라도 놔 먹으려고 집터에 방을 좀 지어보려고 하면 밤에 아주 특공대식으로 해야 했다고. 지어 놓으면 부숴 버리니까."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삼원회관에서 만난 삼원회 이시우 사무국장. /강찬구 기자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삼원회관에서 만난 삼원회 이시우 사무국장. /강찬구 기자

이기찬 씨가 설명을 보탰다. "옛날에 독고다이(특공대의 일본식 읽기에서 연원한 말)라고 있었지요. 무허가 건축물을 단속하는 임시 공무원들인데, 낮에 무허가 건축물을 발견하면 몰려와서 다 부숴버렸다고. 당시 택지 안에 네 가구까지만 짓도록 허용됐는데, 원주민들이 임대를 내려고 지하에도 옥상에도 막 방을 지었거든요. 지금은 벌금 때리고 원상복구 명령 내리는데 옛날에는 바로 행동으로 해버렸던 겁니다. 밤에 다 지어 놓고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못 부쉈기 때문에, 밤에 시멘트 바르고 나면 이불부터 갖다놨지요." 

강장순 전 의원도 가음정동 사례를 들었다. "가음정 주거 지역은 수용 대상이 되고 철거는 거의 마지막에 됐습니다. 공장이 들어서고도 한참을 원래 살던 대로 살았지요. 한창 산단 조성 중일 때는 노동자들 살 곳이 귀하던 때니 주민들이 세를 놓으려고 단칸방을 만드는데, 이미 개발 구역으로 고시가 된 지라 전부 무허가로 취급돼 철거반이 부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건물을 완전히 다 부수는 것은 아니라서, 일부 부수고 가면 주민들은 또다시 짓고 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집의 형태가 만들어져갔던 기억이 있어요." 

창원시에 남아 있는 원주민들은 아직도 대다수가 이주 단지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강찬구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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