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5) 웅남면 연덕-나락모티의 추억

창원은 오랫동안 순박한 농부들의 영토였다. 넓고 기름진 땅 곳곳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고, 상당수는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지만 산과 들, 바다가 낳은 것들로 풍요로웠다. 논밭마다 풍기던 두엄 내음, 바다에 비친 시내 불빛, 아무 곳에나 누우면 쏟아지던 별빛. 창원 원주민들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고향 풍경이다. 창원공단의 기억은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원에서 가장 큰 하천으로 꼽히는 창원천과 남천. 창원천은 북서부 주거지역을 흐르고 남천은 남동부 공단 지대를 적신다.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나가는 일대에 여러 마을이 있었다. 그중 창원군 웅남면 연덕리는 현재 법정동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마을이다. 창원국가산단 내 신성델타테크·카스윈 등 공장에 자리를 내줬다. 옛 마을 유허비만이 쓸쓸히 남아 있지만, 이곳 출신 사람들은 아직도 동향인과 만날 때마다 옛 추억 속에 빠져든다.

▲ 초가집과 흙길이 어우러진 가운데 노거수 아래에 연자방아 맷돌과 오토바이가 놓여 있는 1974년 12월 당시 창원군 웅남면 연덕리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초가집과 흙길이 어우러진 가운데 노거수 아래에 연자방아 맷돌과 오토바이가 놓여 있는 1974년 12월 당시 창원군 웅남면 연덕리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남천 강변 큰 동네 = 연덕리는 웅남면에서 나름 큰 동네 중 하나였다. 1976년 기준 1661가구 8550명이 살았다. 본동네는 똥매(독매)라고 불렸고 약 200m 떨어진 남천 변에 속구(소코)라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 창원지역 다른 마을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농업 종사자였고 마을과 남천 사이 들판마다 논밭이었다.

소코 출신 도희주(56) 동화작가는 "새벽이라도 비만 오면 도롱이를 쓰고 논으로 나가던 아버지가 생각난다"라고 추억했다. 들판 곳곳을 잘 보면 분뇨를 모아 짚으로 덮어 놓은 두엄구덩이가 있었는데, 조심해야 했다. 가까이에서 폴짝폴짝 뛰며 장난치던 마을 아이가 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남천은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었지만 가끔 재해도 안겼다. "아버지 말씀에 1959년 사라호 태풍이 왔을 때 온 남천이 범람해 논을 덮어버렸다고 해요. 7~8월이면 나락이 꽤 굵어지는 시기인데, 전부 모래에 파묻혀 안 보일 정도였다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락을 건지려고 했는데, 아버지는 새끼줄로 모래 높이를 재서 모래 유통업자에게 팔았대요. 그 돈으로 목돈을 쥐어서 논을 더 샀다고 하더군요. (웃음)"

 

1976년 1661가구 8550명 거주
우체국·학교도 있던 '큰 동네'
현재 신성델타테크 등 위치

모든 주민이 농업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슈퍼·방앗간·이발소 등을 운영하거나 포도 과수원을 경작하는 주민도 있었다. 이곳은 우체국과 국민학교 소재지이기도 했다. 창원군 전체를 통틀어도 면사무소 외에는 공공기관이 흔치 않던 시절이다.

마을 안 웅남국민학교에는 가까운 삼동·덕정·창곡·월림리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남천 건너 삼동리(현 삼동공원·창원수목원 자리) 아이들은 등교할 때 남천을 건너야 했는데, 비만 오면 결석하기 일쑤였다. 천영훈(61) 극단 미소 대표는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지금의 삼동교 자리에 다리를 놔 달라고 민원을 넣었는데, 매번 한 칸씩 짓는가 싶다가 흐지부지되곤 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짓다가 만 다리를 '국회의원 다리'라고 불렀다. 셰플러코리아 창원1공장과 창원지식산업센터 사이에 온전한 다리가 만들어진 건 공단 조성 이후다.

▲ 창원공단 ㈜TIC 공장 앞 보도에 있는 옛 연덕리 표지석. /이창우 기자
▲ 창원공단 ㈜TIC 공장 앞 보도에 있는 옛 연덕리 표지석. /이창우 기자
▲ 창원공단 ㈜TIC 공장 앞 보도에 있는 옛 웅남국민학교 표지석. /이창우 기자
▲ 창원공단 ㈜TIC 공장 앞 보도에 있는 옛 웅남국민학교 표지석. /이창우 기자

◇나락모티 갈대밭의 여름 = 지금은 창원천과 남천밖에 없지만, 당시에는 남천 아래쪽에 작은 물줄기 하나가 더 흘렀다. 남천이 지금의 삼동교를 지나면서 남쪽으로 갈라져 들어갔던 이 물줄기는 창원천·남천 합류지점에서 다시 나왔다. 사람들은 남천을 기준으로 이 작은 줄기를 '앞개', 창원천은 '뒷개'라고 했다. 현재 앞개는 ㄷ 모양의 수로로 흔적이 남았다. 앞개와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모래톱이 제법 넓게 형성돼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모두가 나락모티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대규모 염전이 자리 잡았다. 나락모티 인근 창곡리(현 창곡산단)·덕정리(지금의 대원동)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국 해군이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광복 즈음 이곳에 넓은 염전이 펼쳐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 대표가 이곳에서 놀던 1970년대 무렵에는 염전이 사라지고, 온통 갈대밭으로 뒤덮인다. 철새들의 쉼터였다. 그는 "그때는 덕정을 해정이라고도 불렀는데, 별로 멀지 않아서 여름철이 되면 친구들과 멱을 감거나 새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갯벌에서 게도 주우며 놀았다"라며 "당시에는 몰랐는데 염전이 있었던 곳이었고, 알고 보니 덕정리 친구집에서 운영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 친구 동생 이종은(54) 씨는 "아버지께 듣기로는 5.16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염전이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라며 "저 어릴 적에는 아버지와 뒷개 쪽 나락모티에 놀러 가서 숭어잡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똥매''소코'로 흔히 불렸던 곳
강 가까워 비 오면 자주 곤욕
법정명 사라져 이젠 유허비만

현재 나락모티는 죄다 매립됐다. 지금은 한화디펜스 1사업장, HSD엔진, 한국철강 창원공장 등이 들어섰다. 당시 분위기는 좀 더 하류의 봉암갯벌에서 흔적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덕정 출신 윤성구 씨는 2012년 8월 <경남도민일보>에 투고한 독자시에서 고향 생각을 담았다.

'…고향이 생각난다 고기잡이 뒷계 앞계/ 지금은 봉암 갯벌 뚱게조차 없더라/ 잊어버린 해정 땅에 돌아가고 싶어라.'

◇발길 닿는 곳마다 추억 = 물이 가까워 좋았지만, 가끔은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천 대표는 "남천에 비가 많이 와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오면 친구들과 그곳으로 뛰어들었다"라며 "하류 쪽으로 밀려 내려가다 창곡리 근처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놀이였는데, 잘못해서 마산만까지 떠내려가면 그냥 죽는 거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번은 진짜 빠져 죽을 뻔했는데 살려준 친구도 있고, 아직도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한다"라고 덧붙였다.

▲ 도희주(왼쪽) 작가와 천영훈 대표가 연덕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찬구 기자
▲ 도희주(왼쪽) 작가와 천영훈 대표가 연덕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찬구 기자

나락모티로 놀러 가는 길 도중에도 짓궂은 장난을 부렸다. 당시 연덕리에는 작은 공장 2곳이 있었는데 각각 사슬과 종이를 만들었다. 사슬공장은 개줄(개 목줄) 공장이라고 불렀다. 천 대표는 "어중간하게 졸업해 취업을 못한 사람들이 밥벌이하던 곳이었는데, 공장 한쪽에 모아둔 불량 사슬과 폐지를 훔쳐다가 팔았던 기억도 난다"라고 말했다.

동네 곳곳마다 추억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천 대표는 언젠가 아버지가 흙담에 심어놓은 장미넝쿨 풍경을 잊지 못한다. 봉곡동으로 이주할 때 옮겨 심었을 정도로 아꼈다. 지금도 여름철 집 앞에 흐드러진 장미꽃 꿈을 꾸곤 한다. 그는 "봉곡동 이주단지 풍경은 한 번도 꿈에 나온 적 없다"며 웃었다.

'엄지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읍내 저자 다 보시고 / 신작로에 오시지….' 도희주 작가는 선배 아동문학가 고 이원수 작가의 동시에서 어린 시절 연덕리를 지나던 31번 버스를 떠올렸다.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가 마산어시장에 장을 보러 가면, 집 마당에 그림자가 길어지기만 기다렸어요. 뭔가 간식을 사오실 줄 알았거든요. 결국, 그림자가 채 길어지기도 전에 동생 손을 잡고 5리 떨어진 정류장에 나가서 하염없이 기다렸죠. 멀리서 흙먼지가 일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도, 그냥 지나가는 버스가 많아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마침내 엄마가 버스에서 내리면 땅에 내려놓은 '다라이(대야)'에 뭐가 들었는지부터 살폈죠. 지금 생각하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시절이었어요."

/이창우 강찬구 기자 irondumy@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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