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4) 봉림·사파정, 산천의 단편

공단 이전엔 자연 가까워 
창원 둘러싼 산과 시냇물  
삶터이자 놀이터로 기억  

창원은 오랫동안 순박한 농부들의 영토였다. 넓고 기름진 땅 곳곳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고, 상당수는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지만 산과 들, 바다가 낳은 것들로 풍요로웠다. 논밭마다 풍기던 두엄 내음, 바다에 비친 시내 불빛, 아무 곳에나 누우면 쏟아지던 별빛. 창원 원주민들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고향 풍경이다. 창원공단의 기억은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원산단이 들어서게 된 옛 창원군 일대는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북쪽으로는 창원에서 가장 산세가 험하다는 정병산을 포함해 태복산·봉림산·비음산이 있고, 동편에는 대암산과 불모산이 서 있다. 남쪽엔 진해구와 경계를 짓는 장복산이 있다. 분지 안쪽은 불모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마산만 바다로 빠져나가는 줄기인 남천이 흐른다. 이런 특징은 박정희 정부가 창원에 방위산업을 포함한 전략적 거점으로 구상한 기계공업단지를 정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산천도 사람도 그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시가지 외곽에 산 가까이 자리한 창원 봉림·사파정 일대 자연마을의 기억을 창원 산천 이야기와 함께 들었다.

▲ 해방 후 봉림동에서 계속 살아온 이강원 씨가 창원까지 들려오던 한국전쟁 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br /><br /> /강찬구 기자
▲ 해방 후 봉림동에서 계속 살아온 이강원 씨가 창원까지 들려오던 한국전쟁 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강찬구 기자

◇너나 할 것 없이 농사짓던 = "신라 때 무슨 스님이 와서 절을 세웠다 하더만."

5살 때 일본에서 귀국한 후 쭉 봉림동에서 살아온 이강원(85) 씨 말이다. 봉림동은 진경대사가 세운 봉림사에서 유래했다. 봉림사가 들어선 산은 봉림산이 되고, 그 아래 마을은 대봉림, 소봉림으로 불리며 천년을 이어왔다 전해진다.

"전부 농사지었지. 나중에 논 다 넘기고 나서는 볏짚 모아서 한동안 땔감으로 썼다."

공단 배후 도시로 수용되면서 원주민들이 남긴 소봉마을 유허비에는 김해 김씨·밀양 박씨·김녕 김씨·남원 양씨 등이 집성촌을 이뤄 농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는 일반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아파트 단지가 솟아 있지만, 공단 조성 이전에는 작은 마을들 사이로 전답과 농로가 주를 이룬 곳이었다.

사파동에 사는 이기찬(67) 씨도 수용 전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다.

"원래 동네 이름은 사파정동이었다. 그중에서도 동산마을, 50~60호 정도 있던 마을에 살았다."

현재 사파동은 사파정동을 비롯해 남산동·사파동·토월동·대방동을 법정동으로 포함하는 행정동이다. 사파정은 창원 남면 쪽 쌀 주산지였다. 이름 유래도 쌀푸정·쌀무정 등이 변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수용이 늦은 곳이었지만 개발 이전의 기억은 농경에 관한 것이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거의 농사일 거들면서 살았다. 그땐 아이들이 모두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모내기철 되면 새벽에 부모들 일 나갈 때 따라갔다가 와서 등교하곤 했다. 농사일이 하기 싫으니까, 낫질 할 때는 또래들과 '풀 따먹기'란 것을 했다. 진 사람이 풀을 더 베는 거지."

▲ 사파동에 사는 이기찬 씨가 산과 들에서 살던 유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강찬구 기자
▲ 사파동에 사는 이기찬 씨가 산과 들에서 살던 유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강찬구 기자

◇삶에서 멀지 않았던 산과 강 = "그 때는 화목(땔나무)을 해야 해서 아이들이 나무 하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초등학생만 한 작은 아이들은 근처로, 큰 아이들은 산으로 갔다."

이기찬 씨는 창원을 에워싼 산들을 민둥산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이 나무를 워낙 많이 베다 보니까 산에 나무가 없었다. 새벽에 도시락 싸서 올라가면 해가 지고 나서야 내려오곤 했다. 집집마다 연탄보일러 들이고 난 후에 나무가 다시 자랐다. 그 때 나무 안 하러 가도 된다며 좋다 그랬다."

일터로서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날을 정해 하는 회치, 해치라 하는 게 있었다. 불모산·대암산 같은 곳에 갔다."

회치는 경상도 농촌 지역에서 여럿이 모여 가는 나들이를 이르는 말이다. 정확하지 않지만 혹자는 예부터 '희취'라는 전통문화가 있었고, 그 말이 '해치', '회치' 등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연덕동에 살았던 도희주(56) 동화작가도 회치를 기억한다. 도 작가 말이다.

▲ 도희주 작가가 살던 속구 웃동네 사람들이 지금의 소풍 격인 회치를 즐기고 있다. 정면을 향해 춤을 추는 한복입은 여성이 도 작가의 어머니다.  /도희주 작가
▲ 도희주 작가가 살던 속구 웃동네 사람들이 지금의 소풍 격인 회치를 즐기고 있다. 정면을 향해 춤을 추는 한복입은 여성이 도 작가의 어머니다. /도희주 작가

"보통 삼월 삼짇날에, 보리 수확은 남고 모내기는 아직인 때 즈음에 갔다. 한 마을 단위로 어머니들은 한복, 아버지들은 양복을 차려 입고 가는 어른들의 소풍 같은 것이었다. 고기 먹기 힘든 시절에 돼지고기 수육도 하고 떡도 쪄 불모산 성주사 골짜기 같은 데로 가서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 날이어서 아이들도 좋아했다."

분지를 가로지르는 남천은 창원 어느 마을에 산 사람이었든 많은 기억을 남겼다. 이기찬 씨는 남천의 맑은 물과 풍부한 생태를 기억한다.

"봉암에서 은어가 많이 올라왔다. 봉암교 쪽에 가면 장어도 있었고 재첩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남천은 1급수라 소 몰고 가다 물 먹일 때 사람도 같이 마셨다."

가음정동에 살며 창원시의원을 지낸 강장순(61) 씨는 자연이 주던 놀잇감들을 풀어놨다.

"남천 가에 산태방구(바위)란 게 있었다. 미끄럼틀처럼 생겨서 타고 내려가면 물로 떨어지게 돼 있어서 아이들이 모여 놀았다. 남아 있었다면 거창의 명승 수승대만큼, 아니 도심 내에 아직 있는 것이라면 최고의 명소가 됐을 것이다."

강 전 의원은 계속 추억을 더듬었다. "겨울에 남천이 얼면 아이들이 집에서 만든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얼음이 살짝 녹으면 빙판이 울렁울렁 움직이는데, 그 재미로 그곳을 지나가곤 했다. 운이 없으면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는 것이고…."

역사의 조각과 만난 기억들도 있다. 이기찬 씨는 어린 시절 심부름을 다니다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닭 모이로 주기 좋은 게 조개 껍데기다. 가음정 성산패총 주변 작은 산에 가서 땅을 파면 조개 껍데기가 나왔다. 그 주변 아니라 다른 산에 가도 땅을 파면 조개 껍데기가 나왔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옛날 사람들이 먹고 버린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 작은 산들도 애초에 조개 무더기가 쌓인 것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었다. 또 산에서 호박덩굴 같은 걸 파다 보면 안에서 토기 조각이 나왔다. 틀림없이 가야 토기다 싶었는데, 어느 날 마을에 부산 동아대 교수인가 하는 사람이 와 아이들에게 사탕 쥐여주더라. 그러면서 토기 주워놓은 거 있으면 다 가져다 달라 해서 싹 걷어갔다."

▲ 1980년의 사파동. 나무가 거의 없는 산이 눈에 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1980년의 사파동. 나무가 거의 없는 산이 눈에 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산 건너 포성에 실려 온 전쟁 소식 = 한참 앞선 시기인 한국전쟁기의 기억도 들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합포구의 서쪽 외곽은 최남단 전선이면서 임시 수도 부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북한 조선인민군이 공세를 집중한 곳이었다. 이에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마산 전투라 총칭하는 크고 작은 전투들이 이어졌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진동리지구전투가 있다. 마산합포구 진북면에 가면 그 전첩비가 서 있는데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북한군을 격퇴하고 진동리를 되찾은 것을 기리는 내용이다. 현재 창원산단이 있는 당시 창원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둘러싸여 직접 참화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운과 참혹한 풍문, 전쟁이 남긴 상흔은 창원군까지 스며들었다.

마산앞바다로 전선과 떨어진 귀현에 살던 고영조(76) 시인에게 전쟁은 동심에 비친 모습이다.

"밤에 포 쏘는 소리에 산에 올라서 보면 저 멀리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어릴 때니 뭘 알았겠나. 비행기가 지나가면 저 멀리서 대공포를 쏴 대는데, 예광탄이 날아가며 밤하늘에 불빛을 수놓는 것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이강원 씨는 당시의 봉림동 일대의 전운을 기억한다. "전쟁 나고 얼마 뒤에 미군이 들어와서는 근방 학교·운동장에 진을 쳐서 학교를 못 갔다. 그러더니 여기서 용강고개 거쳐, 천주산까지 철책을 치고는 산꼭대기에서 포를 쏘더라. 국군 해병대들이 미군에게 M1소총을 받고 잘 맞는다고 좋아했다더라 하는 식으로 진동전투 이야기도 들었다. 전쟁 때 참혹했다. 전후에 함안 쪽에 사촌 도우러 갔는데, 산에서 흙을 파니까 해골이 나왔다."

우리 현대사에 손꼽히는 광풍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관한 기억도 풀어놨다. "북에서 박헌영이 내려와서 사람들을 포섭했다 하더라고. 면서기 쯤 되는 똑똑한 사람들 상당히 넘어갔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 마을에도 연맹원이 있었다. 어느 날 경찰이 마을을 뒤지니까 사람들이 나와서 산 쪽으로 뛰어올라가더라. 들어보니 잡히면 모아놓고 죽였다더라. 도청 근방 퇴촌, 그리고 성주사에 데려가서 총살했다 들었다."

퇴촌마을과 성주사에서 있었던 학살은 2000년대 중후반 정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에서 다수 증언된 바 있다.

/강찬구 이창우 기자 kcg@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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