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6) 철도 진해선

일제가 침략 목적으로 놓은 기찻길
옛 창원군 지역민들 삶에도 흔적 커

마산·진해와 교류 터준 소통로 역할
등하교·출퇴근길 되고 역마다 번화
시골마을 철로 여기저기 옛 추억들

창원은 오랫동안 순박한 농부들의 영토였다. 넓고 기름진 땅 곳곳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고, 상당수는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지만 산과 들, 바다가 낳은 것들로 풍요로웠다. 논밭마다 풍기던 두엄 내음, 바다에 비친 시내 불빛, 아무 곳에나 누우면 쏟아지던 별빛. 창원 원주민들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고향 풍경이다. 창원공단의 기억은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원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창원군 지역의 교통도 변화한다. 창원의 교통 하면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장대한 창원대로와 도시 안에 바둑판처럼 깔린 도로다. 하지만 산단 조성 이전 창원 지역민의 삶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교통수단은 기차·철도였다. 철도 진해선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경전선의 지선으로 계획, 병탄 초기인 1910년 측량을 시작해 여러 부침 끝에 1926년 11월 11일 완공됐다. 총길이 22.7km에 창원~상남~성주사~경화~진해역을 두었다. 군항을 비롯한 진해항과 철도를 이어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철도는 창원군 사람들 삶에도 스며들었다. 기차는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고, 해방 후에도 오래도록 합리적인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지금 통합 창원시가 된 마산·창원·진해지역이 예부터 연결된 생활권을 둘 수 있게 된 한 축이 진해선이다. 

50여 년간 지역민들과 함께했던 기존 진해선은 산단 건설과 함께 이설된다. 현재 진해선은 창원~신창원~남창원~성주사~경화~진해~통해 7개 역을 거느리고 있다. 1978년 이설 공사에 들어가 1981년 현재의 선로가 됐다. 신창원역은 1961년 신설된 용원역의 새 이름이고 남창원역은 옛 상남역에 붙여진 새 이름이다.  

진해선은 이후 갈수록 여객이 줄어 현재는 대중교통으로서 기능을 잃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정기적인 여객 열차 편성이 있었으나, 현재 운영을 접었다. 한때 진해군항제 손님들을 위한 임시 편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물론 현재도 진해 해군기지의 군수 담당, 화물열차 운송 역할은 여전하다.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안에 마지막 통해역(1961년 설치)이 있는 이유다. 그리고 철로는 통해역을 지나 바닷가 군항으로 이어진다.

1976년 반송동 앞을 지나는 철길. 선로 바로 옆 초가들이 인상적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76년 반송동 앞을 지나는 철길. 선로 바로 옆 초가들이 인상적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사람 모여든 '핫 스팟' = '역세권'은 현재도 주거 환경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1970년대까지는 진해선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가 농사를 짓던 창원군에서도 역 주변은 상업과 서비스업이 자라났다. 옛 성주사역 근방은 역이 들어섬으로써 마을이 형성된 사례다. 

서익진(67)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 상남면 천선리 성주마을에서 살았다. 서 교수는 당시 성주마을 풍경을 말했다. "파출소도 있고 술도가, 성주초등학교도 있는 나름 번화한 곳이었어요. 성주동뿐만 아니라 불모산, 대방 쪽까지는 성주초등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돌아갔지요. 가음정부터는 상남역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상남면이 나뉘어 있었죠." 

창원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윤재필(72) 시인은 상남역 주변 풍경을 회상했다. "상남역이 있는 곳은 면 소재지라 붐볐습니다. 역 남쪽으로 우체국·파출소·양복집·가구점에다 상남초등학교도 있었고, 상남극장이라고 극장도 있는 곳이었지요. 홍등가도 있었던 기억입니다." 

도희주(56) 동화작가의 기억은 마을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을 짐작게 한다. "이모 신혼 댁이 역 근처라 가곤 했는데, 일본식 가옥이 모여 있더라고요."

1978년 창원역 앞 모습. 당시 창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창원산단을 지나는 진해선 역 중에선 상남역 주변이 가장 번화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78년 창원역 앞 모습. 당시 창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창원산단을 지나는 진해선 역 중에선 상남역 주변이 가장 번화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노동과 배움이 흐른 동맥 = 원주민들에게 철로는 도회지로 가는 길이었다. 창원군 일대와 달리 옛 마산과 진해는 일찌감치 시가지를 이뤘다. 마산·진해로 등교나 출근해야 하는 창원군 사람들 다수가 기차를 이용했다. 창원이 도시를 이루기 전 고등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철도에 관련된 기억이 많다. 

용지마을 출신으로 창원시의원을 지낸 김중화(78) 씨의 십대 시절에는 창원에 고등학교가 없었다. "당시 마산·진해에만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전 마산상고로 진학했어요. 버스도 있었지만 기차를 탔다고. 버스는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지만 기차는 때맞춰 오고 서니까. 상남역에서 타서 구 마산역에 내려서 통학했지. 마산이고 진해고 가려면 기차를 많이 탔습니다." 

사파동서 지내온 이기찬(67) 씨도 고교 시절 마산으로 향했다. "버스비가 그때는 비쌌어요. 기차가 더 싸서 기차를 탔습니다." 

어른들은 기차로 밥벌이를 나갔다. 윤재필 시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진해선은 진해군항 군사시설로 주로 갔어요. 그 기능이 제일 컸죠. 상남역에서는 진해 해군공창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리는 걸 봤습니다."  

도희주 작가는 유년기 외할머니 모습을 기억한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장날에 채소 같은 것을 팔러 나가는데, 외할머니는 진해까지 갔어요. 미나리·깻잎·콩잎…. 경화장이 서면 경화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시던 기억이 나네요." 

윤재필 시인이 상남역 주변에 번화했던 거리 풍경을 말하고 있다. /강찬구 기자
윤재필 시인이 상남역 주변에 번화했던 거리 풍경을 말하고 있다. /강찬구 기자

◇만화 속 옛날이야기 같은 추억 = 옛 창원은 원주민들에게 '허허벌판'이라는 과장 섞인 표현으로 기억되곤 하는 농촌이었다. 철길은 논밭 사이를 지나다녔고, 사람들은 주변에서 살고 뛰어놀았다. 아연한 경험도 더러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아련한 추억이다. 

도희주 작가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일'을 떠올렸다. "하굣길에 상남시장 지나서 불곡사 근처에 기찻길과 걷는 길이 교차하는 곳이 있었는데, 요새 같이 차단기가 없었어요. 어느 날 친구랑 가다가 아는 분 트럭을 만나서 얻어 타게 됐는데, 트럭이 기찻길을 지나갈 때 기차가 달려와 가까스로 비켜 간 적이 있어요. 순간 뛰어내리려는데 기차가 '슈웅' 하고 트럭 뒤를 지나갔지요." 

도 작가는 기억을 이어 나갔다. "차단기가 없으니까 이런 모습도 있었어요. 옛날에 애향반이란 게 동네마다 있었는데, 애향반장이 대나무에 마을 이름이 쓰인 깃발을 달고 이끌면 학생들이 줄을 서서 따라갔지요. 철도를 지날 때 기차가 들어오면 애향반장이 깃발로 줄 중간을 끊어서 멈추게 하고 기차가 지나가면 건너게 했는데, 차단기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죠. 또 이것저것 다 없던 때니까,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재미있어요. 시계가 없으니까 열차가 올 때쯤 되면 철길에 귀를 댔다는 거예요. 진동이 느껴지면 기차가 온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서익진 경남대 교수가 성주사역 일대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강찬구 기자
서익진 경남대 교수가 성주사역 일대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강찬구 기자

이기찬 씨도 진풍경을 기억했다. "놀 게 없던 시절인데, 그때도 진해 군항제는 볼거리였다고. 벚꽃장이라 불렀는데, 손님이 많으니까 열차 편성을 엄청나게 길게 했어요. 아이고, 그렇게 해가지고 진해로 간다고 성주사 골짜기를 넘어가는데, 오르막이니까 기차가 잘 가질 못하는 거죠…." 

삼동마을(성산구 삼동동 창원수목원 일대)에 살았던 명희찬(65) 씨도 철길을 놀이터 삼던 추억이 있다. "밤에 철길에 앉아 있으면 동네 형들이 '꼬시락(망둥어의 지역 말) 잡으러 가자!' 했거든. 그러면 집에 들어가 이불에서 솜을 떼다가 기름에 담가 횃불을 만들어서 봉암다리 밑으로 갔어요. 거기 꼬시락이 많았죠. 잡으면 철길에 가서 마늘·고추 썰어서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철길 주변에 모기가 없어서 앉아 있기 좋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철길에 누워서 자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던 기억이에요. 옛날에는 칼이 귀했는데, 쇠붙이를 선로에 올려놓고 찾으러 오면 칼을 만들 수가 있었어요. 기차가 눌러놓았으니까 그걸 갈면 칼이 되는 거지…."

/강찬구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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