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8) 제2단지 조성과 연덕동 일대 수용

1973년 1단지부터 산업단지 조성 시작
연덕동 등 자연마을 헐고 2단지 세워
초기 토지 수용 원주민에 턱없는 보상
농민들 농토 잃고 이주에 어려움 겪어

평화롭게 살던 농부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부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창원군 한복판에 창원대로를 낸 정부는 곧이어 대로 남쪽으로 공장이 들어설 용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3년 12월 제1단지를 시작으로, 제2단지·적현단지·삼동단지·성주단지·차룡단지 등 현재 산단 구역 대부분이 1970년대에 첫 삽을 떴다. 가장 넓은 1·2단지는 이 가운데서도 초기에 조성을 시작했다. 창원대로에 바로 붙여 제1단지를 두었고, 그 아래에 흐르는 남천 너머로 다시 2단지를 두기로 했다.

◇양지바른 땅 싹 밀고 닦은 공장 터 = 제2단지는 산업기지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성을 맡았다. 수자원공사가 발간한 <창원국가산업단지개발사>를 보면 1977년 3월과 5월에 완암지구(90만 2388㎡)·안민지구(61만 8249㎡) 조성을 시작했고, 12월에는 나머지 407만 3000㎡ 면적에 대한 작업에 들어갔다. 완암·안민지구는 1982년 12월에, 나머지는 1998년 10월에 완공됐다. 

원주민 단체 삼원회의 박흥실(67) 이사장은 이렇게 전했다. "초기 이주 대상자들은 사실상 강제수용을 당한 거지요. 평당 몇백 원 보상이 다였지만 저항이라 할 것도 없었고, 대개 '나라가 하는 일인데 따라야 한다' 여겼습니다." 

1994년 4월 제2단지 완암지구의 한 마을 주민들이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때는 수용 초창기와 달리 원주민들도 저항에 나섰다. 완암지구는 1977년 조성이 시작됐다. /양해광 창원향툐자료전시관 관장
1994년 4월 제2단지 완암지구의 한 마을 주민들이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때는 수용 초창기와 달리 원주민들도 저항에 나섰다. 완암지구는 1977년 조성이 시작됐다. /양해광 창원향툐자료전시관 관장

서익진(67) 경남대 교수도 당시를 설명했다. "정부는 초창기 수용당한 사람들에게 '공시지가 보상'을 했거든요. 지금도 시세와 공시지가는 차이가 큰데 그야말로 형편없는 가격이 매겨진 것이지요. 게다가 초기 수용된 땅들은 기름진 옥답이 많았어요. 농사짓기 좋은 땅일수록 헐값에 넘어간 셈입니다. 1980년대부터는 시세에 맞춰 보상하기 시작했고 창원 땅값도 계속 올랐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외곽이나 높은 지대라 우선순위가 못 돼 수용이 늦어진 땅은 보상을 많이 받는 아이러니가 생기게 됐습니다."

수용된 토지는 종류·위치 등에 따라 책정가가 달랐기에 비슷한 시기의 기억이라도 적게는 평(약 3.3㎡)당 몇백 원에서 많게는 몇천 원까지 말하는 이마다 차이가 있다. <창원국가산업단지개발사>에는 평당 △밭 700~800원 △논 305~6500원 △임야 최고 1600원 등으로 돼 있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를 보면 1973년 화폐가치는 지금의 약 17분의 1 수준으로, 당시로는 꽤 괜찮은 보상가였던 평당 5000원을 지금 가치로 환산해보면 8만 5000원 정도가 된다. 마당 있는 집 100평을 가정하면 보상가는 850만 원 정도로, 지금의 부동산 시세와 비교하면 크게 적다. 

◇'지금'이 앗아간 '그때'의 풍요 = 연덕동은 당시 웅남면의 일부로 제2단지 안에 들어가게 됐다. 연덕동 속구(소코)에 살았던 도희주(56) 동화작가는 유년기 연덕동을 풍족한 곳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꽤 넓었지요. 위채엔 방 2칸과 부엌이 있었고 장독대 옆엔 염소우리가 있었습니다. 뒤뜰엔 대나무밭이, 아래채는 외양간도 있었죠. 안마당엔 쌀을 재어두려고 함석판을 둘러서 만든 쌀광이 있었어요. 바깥마당에 30평 정도 텃밭이 있어 갖은 채소를 가꿔 먹고 돼지를 몇 마리 키웠습니다. 논은 상당히 넓어서 모내기 철엔 며칠 동안 동네 사람들의 품앗이가 이어지곤 했어요. 밭도 세 곳 있었고요." 

그러나 토지 수용과 원주민 이주는 도 작가와 가족의 '운명'을 바꿨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논밭만 내주고 재산만 잃었을까. 도 작가는 부모님 이야기를 털어놨다.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대원동으로 이사 가고 나서도 한동안 연덕 남은 땅에서 배추를 키워 리어카에 싣고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고,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천영훈(61) 극단 미소 대표는 가족뿐 아니라 땅을 잃은 다른 사람들도 기억했다. "농지 잃고 어머니는 청소하러 다니고 아버지도 날품팔이로 살게 됐어요. 저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고로 진학하게 됐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갔으니 학교생활도 좋지 않았습니다. 또, 동네 젊은 사람들이 많이 거칠어졌다고 느꼈어요. 그때가 1977년부터 1980년 사이쯤이었지 싶어요. 거의 저학력이었고 짓던 농사 그만두고 할 수 있는 것이 막노동밖에 없었거든요. 술 마시고 공장 들어서고 일하러 온 사람들과 밤마다 주먹질하는 주민들도 있었어요. 주변에 전과자도 꽤 생겼습니다."

1982년의 완암 연덕 일대.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슬레이트 지붕을 한 원주민 가옥과 대조를 이룬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2년의 완암 연덕 일대.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슬레이트 지붕을 한 원주민 가옥과 대조를 이룬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한몫 잡기는커녕 살 곳도 마땅찮아 = "연덕동에서 1차 이주 대상은 대원동에 택지를 받았고, 2차 대상은 지귀동으로 갔다고 알고 있어요. 땅만 받고 집은 알아서 지어야 했는데, 원주민 대부분이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대원동에 방 2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연덕동 논밭과 집 모두를 주고받은 보상액으로도 모자라 빚을 졌지요. 그것도 힘든 사람들은 산골짜기로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도희주 작가의 가족은 다행히도 집을 올렸지만 이후에도 산업단지 개발은 다시 한번 보금자리를 뒤흔들었다. "집안 사정으로 사파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거기가 또 개발 구역이 된 거죠.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집은 전 주인이 양계장을 용도 변경한 것이라, 먼저 보상해준 금액의 50%밖에 안 주도록 법에 돼 있다는 거예요. 수긍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버텼는데, 어느 날 굴착기로 우리 집만 남겨놓고 주변을 다 파버리더군요. 집과 옆에 선 전봇대가 마을에 섬처럼 덩그러니 놓였어요. 그때 기억으로 <전봇대섬>이라는 수필을 썼지요."

봉곡동 주민 이강원(85) 씨는 제2단지 터 원주민들이 이주해 오던 때를 전해주었다. "이쪽에 원주민이 많이 왔어요. 내동 쪽에 먼저 왔는데, 남지·웅남·목리·정리 사람들도 오고. 봉곡중학교 앞에는 천선동 사람들이 왔지. 우체국, 소방대 있던 쪽에 안민·연덕서 온 사람들이 집을 잡았는데, 땅이 한 50㎝ 정도 낮아서 비가 오면 연탄이 젖고 난리가 났죠. 이주해 온 사람들은 땅만 받았습니다. 받은 택지는 경계선도 제대로 없어서, 집을 올려놓고 보니 받은 택지와 위치가 다른 경우도 있었지요. 전기도 다 들어오지 않아서 있는 집에서 끌어다 쓰는 사람이 많았고…. 자기 돈으로 집을 지어야 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벽돌을 한 장씩 쌓아서 짓기도 하데요."

천영훈 대표의 가족은 연덕동 집터가 철거되고 난 1986년에서야 일찍이 택지를 받아두었던 봉곡동으로 이사했다. "이주하면서 사람 간에 등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철거할 때도 동의서 대신 받으러 다니고, 이주 택지에 가서는 건설업자와 짬짜미해서 멋모르는 이주민들에게 집 지어 주겠다며 중간에서 이문을 봤지요.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부지 하나 받아 건사하기도 힘든데, 상가를 올리더군요."

/강찬구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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