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9) 노동자와 아파트

전국서 모여든 노동자 주거 수용 필요
1976년 이후 반송주공 등 아파트 건설

노동자 첫 자가·사택으로 성장 발판
현관문 열고 오가며 이웃공동체 형성
"창원의 젊음, 이주자 다양성에서 나와"

외지인들 창원 정착 보금자리 됐지만
원주민에 박탈감·괴리감 준 곳 되기도

원주민들의 한이 서린 땅 위에 다른 이들의 삶이 움텄다. 가난했지만 미래를 꿈꾸던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학생들,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일부 타 도시 노동자들이 창원에 모여들었다. 공단 구석구석에서 한국 산업화를 뒷받침한 주역들이다. 창원공단은 이들에게 하나의 활주로였다. 사람들이 집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못다 한 배움의 길을 좇는 동안 텅 빈 땅이었던 창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공단 도시 창원'은 이렇듯 원주민들의 희생과 출향인들의 헌신으로 주조된 곳이다.

어린 시절 고향을 등진 창원 기능공들은 일찍 가정을 꾸렸다. 창원 최초의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였던 반송아파트, 조금씩 늘어나던 사원아파트가 이들의 보금자리였다. 처지가 비슷했던 사람들은 같은 층, 같은 동 안에서 마치 예전의 마을 공동체와 같은 정을 나누며 살았다. 
 

1981년 6월 9일 열린 알뜰시장에 반송주공아파트 주민들이 모여든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1년 6월 9일 열린 알뜰시장에 반송주공아파트 주민들이 모여든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0평 공간, 내 집 마련의 꿈 = '쉰네 동 아파트/ 경사진 뒷동 꼭대기 방에서/ 새내기 부부로 사랑놀이를 하고/ 밤을 새우고 허물어가며/ 뱃속의 아이 이름 짓기로 여러 날이 갔다.'(김규동 '반송아파트 6')

공단 조성 이후 창원은 전국 기능공과 유휴 노동력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든 사람과 들 사람을 위한 주거 대책이 절실했다. 1976년 내동주공·남산주공(현 남산효성해링턴플레이스)을 시작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늘어나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기는 비좁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는 1978년 창원 최초의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인 반송주공아파트(현 트리비앙)를 지었다. 1·2단지 통틀어 4560가구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준공 초기에는 빈집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은 생소했고, 가구별 면적이 비좁아 '닭장', '성냥갑'이라는 멸칭도 뒤따랐다. 당시 1단지 가구는 10·13·15·17평, 2단지는 전부 10평에 불과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허허벌판 위에 세워진 데다 밤이면 불빛도 뜸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났다. 

반송아파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다. 1985년, 양덕동에서 달세를 살던 김규동(62) 시인은 이곳에 생애 첫 둥지를 마련했다. 10평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내 집'이었다. 5층에서 1층까지 한 번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시설, 연탄 아궁이를 입식 부엌으로 개조하고 기름보일러를 들인 추억 등 구석구석이 눈에 선하다. 
 

2000년 1월 반송주공아파트 복도에 다 쓴 연탄과 새 연탄이 쌓여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2000년 1월 반송주공아파트 복도에 다 쓴 연탄과 새 연탄이 쌓여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집들이 선물 받은 화장지를 다 쓰면 떠난다'고 농담할 정도로 이사를 자주 했는데, 첫 입주 2년 뒤 17평으로 옮길 때만큼 감동적이었던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누가 저길 들어가나' 하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형편 어려운 사람 처지에서는 반송아파트 말고 딱히 갈 곳도 없었죠. 타지에서 창원에 와 정착한 사람 중 절반은 다 반송아파트를 거쳐 갔다고 봐도 될 겁니다. 이곳을 발판 삼아 이사 간 사람들 빈자리를 여러 회사가 독신자 숙소로 활용하기도 했죠."

◇끈끈했던 아파트 공동체 = 당시 반송아파트는 5층이었는데 층마다 2가구씩 마주 봤다. 나이도 형편도 고만고만했던 젊은 부부들은 난생처음 살아보는 아파트에서 이웃사촌으로 연을 맺었다.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가 지난 8월 17일 본사 사무실에서 반송아파트에 살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가 지난 8월 17일 본사 사무실에서 반송아파트에 살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도 부산기계공고 1년 후배였던 김규동 시인과 반송아파트 7동 5층에서 다시  만났다. 어차피 맨 끝 층이라 두 가족 외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으니 양쪽 현관문을 항상 열고 지냈다. 아이들은 그 사이 복도에 깔린 매트에서 이집 저집 번갈아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옆집 이웃들도 그랬지만 같은 열 계단을 함께 쓰는 10가구는 기본적으로 돈독했다. 

"저보다 조금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다 보니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돌아가면서 자기 집에 초대하면 십수 명이 좁은 집에서 밥도 먹고, 술도 한 잔씩 했죠. 냄비 같은 걸 두드리며 노래도 부르고, 한 가족처럼 흥겹게 놀았어요. 그때는 노래방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반송아파트에서 모여 살던 사람들은 아직도 1년에 한 번씩 꼭 만납니다. 꼭 10년을 살았는데, 잊을 수 없는 추억이네요."

창원 내 다른 아파트에도 정감 어린 풍경이 가득했다. 같은 회사 사람들이 모인 사원아파트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조형규(47) 창원대 교수는 어린 시절 내동 효성중공업 사원아파트에서 살았다. 내동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마치고 5층 집으로 올라가면 층마다 '이제 오냐' 하고 반겼다. 아파트 사람들은 때마다 닭을 잡아 같은 동 사람들끼리 나눠 먹었고, 늦게까지 다른 집에서 놀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일도 일상다반사였다. 아파트 뒤는 중공업 단지였는데, 점심시간이면 음악이 흘러나왔다. 보통은 대중음악을 틀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민중가요나 투쟁가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현대사를 공부하고 나서야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걸 알았죠. 어릴 때는 그냥 모든 아버지가 나가서 시위하는 줄 알았거든요. 한 번은 아파트 같은 열에 사는 친한 친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쪽에 안 서고 멀찍이 팔짱 끼고 지켜보길래, 의아해서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어요. 어렸고 다 친한 줄로만 알았는데 회사 안에서의 위치가 다르고,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었죠."
 

1980년 5월 반송주공아파트 내 설치된 반송동골목유아원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 골목유아원이란 당시 각 지역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던 무인가 유아교육시설이다.
1980년 5월 반송주공아파트 내 설치된 반송동골목유아원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 골목유아원이란 당시 각 지역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던 무인가 유아교육시설이다. 

◇아파트 밖 원주민의 기억 = "창원시가 인구·규모가 비슷한 다른 도시와 비교해 가지는 가장 큰 특징 중 중요한 부분이 이주자가 많은 젊은 도시라는 점이에요. 다양한 생각·문화가 용광로처럼 섞일 수 있었거든요. 세계 역사를 살펴봐도 도시가 번성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 다양성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한쪽으로 쏠린 경남에서, 진보 정당 국회의원이 당선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앞으로도 굵직한 경제 정책보다는 대중교통 정비 등 개방적인 도시 정책을 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도시학을 전공한 조 교수의 진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 아파트는 팔도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실제로 섞이고 녹아들게 만든 공간이었다. 공적으로는 산업 역군이라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사적으로는 이웃의 정을 나누는 동안 서서히 '창원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거나 고급화하면서 외지 노동자들은 더 좋은 곳으로 집을 옮기고, 세간살이를 늘려나갔다. 이들에게 창원공단에서의 기억이 보람으로 가득한 이유 중 하나다.

동시에 이주단지로 쫓겨간 창원 원주민들과의 이질성은 더욱 짙어졌다. 생업을 잃고 기술도 없었던 원주민 대부분은 아파트가 늘어나도 겨우 지어 올린 이주단지 주택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용도 제한으로 묶여 상업 활동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들이 떠올리는 창원공단, 그리고 신도시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성이었다. 외지 노동자들은 때때로 본토박이들과 마주쳤지만, 이런 애환까지는 잘 실감하지 못했다. 이미 창원에는 객지 사람이 훨씬 많았고, 원주민은 소수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객지 놈들끼리 다 해 먹어라." 김규동 시인은 동남지역공업단지관리공단(현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 앞에서 리어카를 끌던 한 노인이 뱉은 말을 떠올렸다. 스스로 '창원사람'이라고 느낄 때쯤이었다.

"그전까지는 줄 잘 서 좋은 회사 들어왔고, 내가 열심히 해서 먹고산다는 생각만 했지, 원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죠. 나 먹고살기도 바빴으니까…. 그때부터 없어진 동네 유허비가 보이면 일부러 유심히 보곤 합니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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