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 잊힌, 가려진 이야기들

지금껏 창원의 이야기는 대개 성공가도로 그려진 '산업사'거나 '도시사'였다. 그 신화의 원심력은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 창원의 모습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산단과 함께 삶을 꾸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흩어버렸다. 그러나 산단의 흔적은 그들의 삶에 여전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기억하는 것은 쉼 없이 달려온 산업화가 남긴 아픔을 달래고 창원의 역사를 풍성하게 하는 동시에 그 품격을 더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경남도민일보>는 7월부터 11월까지 '공단의 기억'을 매주 한 편씩 20회 싣는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 여러분에게 경제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공업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 창원과 그 출발점인 창원국가산업단지(이하 창원산단) 역사를 더듬다 보면 마주치는 첫 '공식적' 기억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창원산단은 경남 제조업 생산의 29.7%, 국내 기계산업 생산의 16.2%를 책임지고 있다. 약 2572만 8000㎡(777만 7000평)의 용지 안에 2861개 업체가 들어섰고, 한 해 약 45조 2361억 원어치 제품을 생산한다. 수출액은 119억 3000만 달러(한화 약 15조 1800억 원)어치에 달한다. 단지 내 노동자만 12만 104명으로, 창원시민(약 103만 명) 중 약 11.6%다. 국가가 추진한 기계공업 중심지다운 무게감이다. 하지만, 성공 신화의 빛이 아래에 드리운 그늘은 없었을까.

▲ 산단 조성 전 자연발생적 모습을 간직한 1973년의 창원 전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산단 조성 전 자연발생적 모습을 간직한 1973년의 창원 전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산업도시 창원의 탄생 = 1970년대 초, 한국 경제를 떠받치던 경공업 수출이 대내외적 조건 변화로 한계에 부딪쳤다. 베트남 전쟁 특수도 끝났고 국내 경제는 둔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은 중화학공업화로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대통령에게 올린다. 이후 정부는 제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이 내용을 반영하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꾀했다. 박 대통령이 1973년 중화학공업 시대를 선언한 배경이다. 목표는 10년 동안 연간 100억 달러 수출·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그 중 50%를 중화학공업으로 일구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선언 직후, 오원철 수석은 <공업구조개편론>을 보고하며 기계공업 중심지 기본지침을 명시했다.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교육·연구단지, 배후도시를 갖춘 '대단위 기지계획'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창원은 유력 후보지로 검토됐다. 박 대통령은 그해 4월 창원을 방문해 직접 입지를 살폈고, 5개월 뒤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 건설' 지시를 내렸다. 왜 창원이었을까?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서 물위로
산업 고도화 일환 기계공업 거점 필요
창원군, 지리·경제환경상 최적지 낙점

 

이 결정에는 창원 일대의 지리적 이점이 주된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학공업은 업종·업체간은 물론, 원료-중간재-완제품의 생산·기술 연관관계가 커 공장의 집적이 필요하다. 또 크고 많은 장비가 필요해 넓은 터를 갖추고 산업용수 공급 등이 유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창원은 기계공업기지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땅이었다. 창원은 포항·울산·대구·구미·부산·진주·마산 등 당시 산업도시들이 그리는 '공업벨트' 가운데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남해고속도로와 경전선·진해선 철도로 이들 산업도시와 이어졌고, 마산항을 끼고 있어 뱃길도 열려 있었다. 500~800m 높이 산들로 둘러싸인 5000㏊ 평야는 보안에도 유리할 뿐더러 공장 집적, 주거단지 조성이라는 목적에도 알맞았다.

이후 산단 조성은 급물살을 탔다.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 시행은 산업기지개발공사(현재 한국수자원공사)가 도맡게 됐고, 이듬해 건설부는 산단 구역면적 약 4335만㎡(공업용지 약 1745만㎡) 조성을 고시했다. 현재 백만 특례시를 이룬 젖줄이자 수많은 사람의 이주와 정착, 융화의 용광로는 이렇게 터를 잡았다.

▲ 1974년 창원에 온 박정희(오른쪽 첫째) 대통령이 산업단지 터를 살펴보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1974년 창원에 온 박정희(오른쪽 첫째) 대통령이 산업단지 터를 살펴보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고향에서 밀려난 사람들 = 창원(당시 창원군)은 30~40여 개 농촌마을만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아스팔트 대로와 거대한 쇳덩이들이 들어섰다. 산업단지라는 국가의 '인위'는 이곳 주민의 삶과 기억에도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기며 지역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창원에서 현재를 사는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살았던 연덕동 마을은 '속구 웃동네'로 불렸는데,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죠. 어느날부터 하루하루 동네가 달라졌어요. 나라가 시킨 일이라고, 동네 사람들 모두 땅을 내주고 대원동으로 이사한다고 하더군요. 우리 마을에 공장을 세운다고…." 창원시 성산구 웅남동(당시 지명 연덕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도희주 동화작가가 기억하는 산단 조성 당시 기억이다.

빛은 이곳에 그늘을 드리웠다. 도 작가처럼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났다. 창원산단 터는 전답과 대지가 주를 이뤘기에 단지 조성을 위해 방대한 규모의 토지 매입과 기존 시설의 철거가 필요했다. 시작은 공장 용지였다. 가장 빨랐던 제1단지(현 LG전자 창원1공장·SNT중공업 공장 등 위치) 조성에만 가옥 568동이 철거되고 원주민 1165명이 이주했다. 이후 1978년까지 현재 산단 내 공업지역 대부분에 걸쳐 총 1765가구 9523명의 주민이 집을 떠났다. 기지대로 위 배후도시(중심상업지구·주거단지)에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산단 터 이주 권위적 강행 상처 남겨
초기이주 원주민들 "사실상 강제수용"
도시화·인구 유입, 독특한 정체성 형성

 

토지수용과 이주에는 당사자들의 결정권이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특히 70년대부터 80년대 초에는 보상도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박흥실 삼원회(산단 지역 원주민 단체) 이사장은 "초창기 이주한 사람들은 사실상 강제수용을 당했고, 반발했다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간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시우 삼원회 사무국장은 "택지 하나 주고 집을 알아서 지으라는 식이었는데, 보상액이 새집 건축비도 다 충당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도 작가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덕동에선 넓은 집에 살았고 논밭을 크게 일궈 부족함을 몰랐다"라며 "그것들을 두고 방 두 칸이 전부인 곳으로 이사를 갔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도 빚을 졌고, 가세는 기울어만 갔다. 도 작가는 "연덕동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1975년에 제작된 창원기계공업기지의 구상을 담은 조감도.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 1975년에 제작된 창원기계공업기지의 구상을 담은 조감도.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창원으로' 떠난 사람들 = 창원산단은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인 만큼 다른 지역에서 직업을 찾아 온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창원 토박이들, 혹은 전국 각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함께 뒤섞였다. 노동하고, 가족을 만들고, 추억을 쌓으며 '창원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박 이사장은 "공단 건설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100%가 원주민이었지만, 지금은 후손들까지 합해 5~10%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며 "100만 도시가 된 데는 타지에서 온 분들의 역할이 빠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질적인 삶이 섞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풍경들도 있다. 도 작가는 초등(국민)학교 시절, 어느날 전학 온 '서울 아이들'을 떠올렸다. "토박이들은 고무줄 바지나 치마를 교복처럼 입고 있었지만, 전학 온 아이들은 말씨부터 옷차림까지 모두 달랐어요.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꽃무늬 헤어핀을 꽂기도 하고…. 너무 하얗고 예뻐서 다른 세상 사람 같았어요."

산단이 들어서면서 현재 통합창원시 내의 지리적 여건과 위상도 변화가 있었다. 수차례 행정구역과 지명이 바뀌었고, 지역 내 경제·행정적 위상이 달라졌다. 이 사무국장은 지금과 사뭇 달랐던 예전 모습을 묘사했다. 그는 "옛날에는 마산에서 창원까지 가는 택시가 없었다"라며 "때문에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오고 난 뒤에는 택시기사들에게 도청으로 와 출석카드를 찍도록 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퇴근하면 창원행 택시를 잡을 수 없어 단체로 모여서 총알택시란 것을 타야 했다"라고 회상했다.

/강찬구 이창우 기자 kcg@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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