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8) 남녀 노동자들의 만남

젊은 기능공들 주말이면 기숙사 '탈출'
마산 진출 산호동과 '홍콩빠'서 어울려
작업복이 월급날까지 '외상 보증 수표'

창원 '남공'-마산 '여공' 구도 형성돼
단골 분식집 주인이 사랑 이어주기도
일일 찻집·주점 함께 여는 자선 활동도

원주민들의 한이 서린 땅 위에 다른 이들의 삶이 움텄다. 가난했지만 미래를 꿈꾸던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학생들,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일부 타 도시 노동자들이 창원에 모여들었다. 공단 구석구석에서 한국 산업화를 뒷받침한 주역들이다. 창원공단은 이들에게 하나의 활주로였다. 사람들이 집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못다 한 배움의 길을 좇는 동안 텅 빈 땅이었던 창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공단 도시 창원'은 이렇듯 원주민들의 희생과 출향인들의 헌신으로 주조된 곳이다.

기계공고 시절부터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자부심을 체화한 기능공들이었지만, 샛별 보고 출근해 달빛 아래 퇴근하던 일상에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기숙사 생활이 불편했던 이들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원주민 마을에서 자취하거나 아예 마산 쪽에 집을 구했다. 월급날이나 빨간 날(공휴일)이 오면, 논밭만 있던 창원에서 벗어나 마산으로 향했다. 

◇작업복 뽐내며 '홍콩빠' 쏘다니던 시절 = '저녁에만 찾아가는 어시장 홍콩빠…(중략)…참 숯불 피워둔 오동동 불갈비집/ 개똥철학 뜬구름 잡아 연기 지피고/ 손바닥 굳은살 맞잡고 위로하며/ 동동주 걸치면서 주고받는 비곗살/ 마산역 옆 옹기종기 민물횟집 놀이마당/ 기적 따라 모여든 팔도 뜨내기들과 /사나이의 의리 찾다 아스팔트 헤딩하고/ 파출소 철창 갇혀 벌금만 축낸 정열…'(김규동 '세월 2')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김규동(62) 시인은 신입 시절에 마산 양덕동 중국집, 수출자유지역 후문 통닭집, 산호동 육교 옆 생맥주 골목, 남성동 홍콩빠에서 보낸 젊은 날들을 잊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홍콩빠'는 당시 기능공들의 회상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장소다. 이곳은 단순한 가게 이름이 아니라 남성동 부둣가(마산어시장 인근)에 형성된 횟집 거리의 별칭이다. 방파제와 바다 사이 나무판자를 고정해 올린 엉성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판자 위로 더러운 '콜라 빛'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곳이다. 저렴한 안줏거리를 찾던 학생들과 기능공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바로 버스를 탔죠. 요즘 학생들이 대학교 이름 찍힌 단체복을 뽐내는 것처럼, 당시 대기업 작업복을 입고 가면 외상 보증수표였습니다. 일단 외상 내고 술을 먹었다가 월급 타면 갚는 일을 반복하곤 했죠. 외상 갚는 날이면 가게 주인들이 공짜로 술을 쏘는 날도 있었습니다."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시간이 흘러 홍콩빠는 현재의 어시장 모습으로 정비되고 창원에도 용지동·중앙동·상남동 순으로 번화가가 형성됐다. 강천(60) 동양코어 대표는 잠깐의 서울 생활을 끝내고 오랜만에 창원에 돌아온 1989년  변화를 실감했다. 

"재취업해서 오니까 내동상가(내동), 삼일상가(중앙동), 동성상가(사파동), 경창상가(상남동) 등 놀 만한 곳이 많이 생겼더라고. 그때도 큰 회식은 마산에서 하긴 했지만, 우리끼리 먹을 때는 창원에서 해결했어요. 지금은 완전 역전돼 버린 창원-마산 상권을 보면 상전벽해죠."

◇분식집 아주머니가 양쪽 연결 = 창원공단이 들어선 이후 창원은 '남성 노동자', 마산은 '여성 노동자'라는 구도가 성립됐다. 1960~70년대 마산 양덕동 한일합섬과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이미 여성 노동자가 많았고, 창원에는 갓 성인이 된 남성 기능공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김규동 시인은 수출자유지역 후문 분식집 아주머니가 자주 양쪽을 연결해줬다고 했다.

"아주머니께 '이번 주 8명'이라고 말씀드리면 동경전자·동경실리콘·한국TC전자 등 회사 작업반장 전화번호를 주거든요. 그러면 대표들끼리 말을 맞춰서 지금 양덕파출소 옆에 있던 삼일다방, 금강다방에서 다 같이 놀고 그랬죠. 휴일에는 밀양 삼랑진 낙동강 변 나들이도 갔고, 멀리는 하동 송림 같은 곳으로 1박 2일 단체여행도 떠났습니다."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마산역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 안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동안 사랑하거나 눈이 맞는 남녀가 있었다. 그중에는 백년가약까지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수출자유지역 쪽 대표와 약속을 잡던 역할을 주로 김 시인이 맡았는데, 양쪽을 번갈아 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고등학교 때부터 객지 생활했던 기능공들은 하나같이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웠어요. 어려서 홀로 가정을 책임지던 여공들도 외롭긴 마찬가지였죠. 다들 일찍 돈 벌다 보니 스무 살 되자마자 결혼하는 사람도 있었죠. 집에서 도움받을 게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 집안 눈치 볼 것도 없었어요. 요즘처럼 서로 이것저것 재지도 않고 마음에 들면 바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 시인도 그런 세태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미팅은 아니었지만, 선배 따라 옮긴 교회에서 만난 여인과 24살 되던 해 결혼했다. 강원도에 있는 본가에 데려갈까 고민하던 김 시인에게 어머니는 "네가 정했으면 안 봐도 괜찮다"고 말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풍경이다. 

◇천금 같은 휴일 일일 찻집 봉사도 = 젊은 남녀들이 만나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순박했던 젊은이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 일일 찻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일 찻집이란 다방 등 가게를 하루 통째로 빌려서 직접 표를 팔아 운영하는 식이었다. 500원짜리 커피라면, 1000원에 팔아 좋은 일에 썼다. 대학생들뿐 아니라 공단의 젊은 노동자들도 함께 이런 문화를 이끌었다. 황병득(63) 티에스테크 대표나 성남주(61) 작가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8년 마산어시장 '홍콩빠' 거리 풍경.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황 대표와 친구들은 수익금으로 연탄을 산 뒤 보육원(현 아동양육시설)이나 양로원 등에 기부했다. 좋은 일에 쓰인다는 걸 알기에, 사람들이 많게는 10장, 20장씩 사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미있었어요. 수출자유지역 여공들은 직접 운영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6~7명씩 와서 일부러 봉사해주곤 했어요. 우리가 커피를 만들 동안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해줬죠. 그러면 아무래도 찻집 운영이 더 잘될 수밖에 없죠. 친구 중에는 그러다 연애까지 하는 일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성 작가도 창원에 오자마자 선배들을 따라 일일 찻집 운영에 나섰다. 몇 번 하다 보니 '일일 찻집'은 많아도 '일일 주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리기도 했다. 며칠 동안 사전 조사한 후 하루 예상 수익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 클럽 소유주도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일일 주점 운영에 인건비는 나오지 않으니 수익은 보장됐다. 정말 좋은 목적에 쓴다면 오히려 받은 임대료 중 일부를 찬조하는 소유주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인간미가 남아있었던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월급이 30만 원이 채 안 됐었는데 나이트클럽 일일 주점에서 번 돈 300만 원으로 홍익재활원이라는 곳에 동물원을 지어준 적도 있습니다. 일일 찻집 관련해 아직 잊을 수 없는 기억도 떠오릅니다. 당시 오토바이 회사에 다니다 보니 직원들이 싸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한 친구가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 가보니 다리 두 개, 팔 하나가 부러져 드릴로 뼈에 구멍을 뚫고 있더군요. 작업 반원들 다 데리고 일일 찻집을 열어 그 친구 병원비를 마련해줬었죠." 이때의 일일 찻집 문화는 아직도 일부 사회복지법인들이 이어받아 계속되고 있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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