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맡겨두고 세상과 격리되는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인터넷 검색이 허용되지만, 사실상 신문과 TV만이 세상과 연결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하는 이 일을 아직은 챗지피티(GPT)가 못 하지만, 언제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유명 대학에서 시험 중 챗지피티를 쓴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되었고, 시험이 전면 무효가 되어 재시험을 치르게 됐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재시험을 치르게 된다면 정직하게 응시한 학생들도 피해를 볼 것입니다. 하지만, 곧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 구마모토현변호사회와 국제교류회에 참여해 ‘AI(인공지능)와 변호사 업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행사 후 친목회에서 한 일본 변호사가 말했다. “9년 전 나 선생이 한국의 전자소송 제도를 소개할 때 참 신기했는데, 이제 우리가 전자소송을 도입하니 한국 변호사들은 AI로 한발 더 나가 있네요.” 이어 “한국은 영상재판도 한다죠? 좀 편리한가요?”라고 묻기에, 나는 “영상재판이 편할 때도 있는데, 서울 변호사들이 지방 사건을 더 저렴하게 수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도 도쿄 변
2022년 11월 드디어 인공지능(AI)이 우리 곁으로 왔다. 오픈AI사의 챗지피티(GPT)가 출시된 것이다. 회사의 CEO 샘 올트먼은 AI 발전 단계를 5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는 대화만 가능한 챗봇이고, 마지막 5단계는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는 AGI(범용인공지능)다. 지금은 그 중간 단계로, AI가 개인비서 역할을 하는 AI에이전트 수준까지 와 있다. 그는 앞으로 5년 내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일하는 AI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올해 중국에서 출시된 ‘마누스’라는 멀티 에이전트는 여러 에이전트들이 동시에 협력해서
갑자기 동장군이 들이닥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드는데 거꾸로 저잣거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모임도 잦고 포차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목청도 더 높아진다. 모두 내년 지자체 선거 때문이다. 내년 6월 도지사와 시장·군수, 기초·광역의원, 경남교육감을 뽑는 민주주의 축제를 앞두고 기대를 품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걱정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뽑은 의원들이 우리 얼굴을 먹칠하는 꼴은 더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내 기억에 과거 선거에서 뽑힌 의원들이 지역을 자랑스럽게 만든 적은 거의 없었다. 거꾸로 정치의
2026년,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해’로 공식 지정됐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의 힘’을 통해 세계 평화를 추구한 김구 선생의 비전이 유네스코의 보편적 가치와 부합했기 때문이라며 유네스코 총회 결정 배경을 밝혔다. 1945년 11월에 만들어진 유네스코 헌장 서문은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어떤 참전국들도 예상치 못한 끔찍한 세계 대전쟁의 폐허를 목도한 직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명구이다.
주식이라고는 쌀밖에 모르던 내가 어쩌다 보니 주식을 하게 됐다. 주가수익비율(PER)이 낮다, 거래량이 터졌다, 세력이 들어왔다…. 몇 달 전만 해도 달나라 얘기처럼 들리던 말들을 이젠 내가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주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5개월. 나는 달라졌다. 생각보다 많이.먼저, 관심 뉴스부터 바뀌었다. 예전엔 신문을 펼치면 정치, 사회면부터 훑었는데, 요즘은 경제면을 먼저 찾는다. 주식 초보를 위한 참고서에 줄을 긋고, 그동안 제목만 보던 경제 도서를 정독한다. 우원식 국회의장보다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말 한마
“역사는 무릇 역사에서 이루어지고, 사실은 무릇 사실에서 이루어진다.(歷史就是歷史, 事實就是事實)” 이 글은 중국 남경대학살유적지 출구에 새겨진 결속문(結束文) 문장의 첫 구절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백골로 누운 자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은 역사이고, 그 역사는 그 사실을 기억한다. 말없이 누운 백골은 천 마디 말보다 진실한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두 달 동안 30만 명의 주검이 도시를 덮
이은문화살롱에서는 매주 한번 낭독극을 진행한다. 지금은 ‘경로당 폰팅 사건’을 연습하고 있다. 제목은 웃기지만 내용은 사람들의 외로움을 담고 있다. 택배 배달을 왔다가 경로당 전화로 몰래 폰팅하는 30대 택배 기사도, 경로당에 나와 자식 자랑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외롭긴 매한가지. 외로운 할머니들은 자식 같은 젊은 남자들의 재롱에 빠져 건강식품을 사재기하고, 고객들의 닦달에 지친 택배 기사는 “오빠~ 외로우신가요? 제가 위로해 드릴 게요”라는 폰팅걸의 유혹에 빠져든다. 낭독을 하며 대본 속 주인공들의 외로움은 우리들의 외로움이
APEC에 관한 묵은 잔상은 단체 사진이다. 크고 작은 나라의 우두머리들이 개최국 전통의상을 입고 주르르 서서 찍은 사진 말이다. 몇 해 전 외신에서 ‘우스꽝스러운 셔츠(silly shirts) 행사’란 기사를 보고 그 동네서도 그게 유난해 보였구나 싶었다. 태평양 너른 바다를 도래도래 끼고 앉은 나라들이 벌이는 영양가 고만고만한 계 모임 같은 것이라 가볍게 여기는 느낌 또한 엇비슷했다.그러나 이번엔 그리 간단치 않다. 이재명 정부는 이 친목 행사에 명운을 걸다시피 핏발을 세웠다. 다시 열강의 먹이다툼 틈바구니에 빠졌다는 위기의 느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희 가족도 페스타 이틀째에 공연 보았습니다.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정말 감동이었고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마지막에 기차놀이도 했답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있다면 산호작은도서관에 방문해 볼게요.” 꾸준히 도서관 소식을 올리는 블로그에 한 이웃이 남긴 답글을 보고 즐거움 가득했던 책 잔치가 다시 떠올랐다.이달 1일과 2일 양일간 열렸던 ‘2025 창원 북페스타’에 참가 신청을 하고 나서 이왕이면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두 보여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 도서관에서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다녀온 지리산 아래 작은 마을, 신선한 공기, 웅장하게 솟은 나무들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빛 ‘감 요정’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 앞에 선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느낀다. ‘숲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큰 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작은 나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란다. 큰 나무는 때로는 옆으로 뻗어 작은 나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나무들의 뿌리는 서로 이어져 있다. 필요한 양분을 나누고, 위험을 알리며, 어린나무들을 돌본
오픈AI가 12월부터 성인용 대화와 창작 콘텐츠를 허용하는 ‘어덜트(성인) 모드’를 운영하겠다고 한다. 성적 대화, 감정 교류, 딥페이크 수준의 영상 생성까지 그동안 윤리적인 이유로 제한했던 것을 모두 허용하겠다는 것이다.물론 성인용 기능을 허용한 챗봇은 비단 챗지피티(GPT)만은 아니다. 그러나 챗GPT는 글로벌 AI(인공지능) 챗봇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보편적인 서비스로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챗GPT는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 최근 카카오톡은 ‘챗GPT 포 카카오’ 서비스를 제공
정부가 배임죄를 폐지하겠다고 한다. 재계는 예전부터 그런 요구를 해 왔지만 당정이 합치된 의견으로 공식 화답한 것은 이번 정부가 처음이다. 정부는 배임죄는 폐지하고 그 범위를 축소하는 대체 입법을 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지만 하나같이 문제가 많다. 아니, 애초 문제없는 대안은 있기 어려울 것이기에 매우 우려스럽다.이재명 대통령의 ‘대장동 사건’ 혐의가 무죄가 되는 방법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배임죄를 고쳐서 공무원은 말고 기업 종사자만 처벌받게 하자고 한다. 기업은 지키고 국가는 지키지 말자가 되어버리는 것도 문제이
누구나 지니는 ‘보통의 마음’. 이를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고, 기쁨을 나누며, 어려운 이웃을 보면 기꺼이 손을 내미는 행위. 오랜 세월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다. 내면에 새겨진 기본적인 도리이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상호 작용의 출발점이기도 하다.익숙한 상식의 틀을 넘어 인지상정(仁知相情)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해본다. 어짊(仁)을 알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단순히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수동적 공감을 넘어, ‘인(仁)’이라는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 드라마 시장에 진출한 이후 한국 드라마산업은 국제화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산업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후 드라마 시장은 KBS·MBC·SBS 같은 지상파 방송이 최대 공급처인 독점적 국내시장이었습니다. 제작사가 공급하는 드라마는 1년에 90편 내외가 편성되었고 주로 지상파 방송에서만 방영되었습니다. 제작사보다 지상파가 갑의 위치에서 드라마의 제작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였습니다.그러나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이후 한국 드라마 산업은 세계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적 현상
외과 전공의 4년차 때 70대의 아버지가 뇌종양인 걸 알았습니다.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죠. 아버지 포함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의료인인 집안에서 서로의 무심함에 각자 때늦은 후회를 새겼습니다. 다만, 당신의 60대 초반부터 늘 입버릇처럼 당신의 아버지도 삼촌도 형도 다들 70까지는 못 살더라며 미리 마음을 훈련해 주셨던지라 올 것이 왔구나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또 하나 늘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갑자기 쓰러지더라도 절대 인공호흡기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요. 저 또한 그러리라 여겼으므로 앞의 말씀보다
카프는 사회주의 문화단체를 표방하며 공식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사회주의 조직노선을 따랐다. 하지만, 카프의 구성원들은 이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삶에 천착했다. 카프 작가들은 운동과 일상의 교차점에 서서 세계를 읽고 작품을 창작했다. 운동과 일상의 교차란 삶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위한 열망을 작품에 담아내는 과정이다. 운동에 기울면 생경한 구호가 난무하는 소설이, 일상에 기울면 심리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카프는 그 중간에서 주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양쪽을 총괄하고자 했다.젠더라는 문제틀은 카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장애인평생교육법이 마침내 제정되었다. 이는 2021년 21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지 4년여 만의 성과이자, 장애인 당사자들의 6년간 끈질긴 제정운동이 맺은 결실이다.중증장애인들과 독서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내 또래인데도 모두 공교육 학교 재학 경험이 없었다. ‘학창시절’이라는 말에 누군가는 전혀 공감할 수 없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에 놀라고 그걸 이제야 내가 알았다는 것에 놀랐다. 생각해보면 교사로서도 전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계속 입학을 유예하고 있는 12세 어린이를 본 적이 있었다.그 어린이에게 학
구로자와 아키라(1920~1998) 감독의 1990년 명작 속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멸한 3중대 군인의 영혼들과 유일한 생존자(중대장)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개 같은’ 죽음을 당해야 했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한 중대장의 인간적 책임감과 더불어 무의미한 전쟁을 강요하는 국가주의의 무책임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면이다.이 영화를 떠올린 까닭은 최근 대한민국에서 검찰청이 폐지되고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거세게 조성되자 일부 정치 검사들이 보여준 무책임성 때문이다. 다른 말로, 검사 임용 시 맨 처음 하게 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국회 답변에서 인용한 이 문장은 사법의 책무를 강조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국회에서 이 말을 꺼낸 맥락은 되레 그 문장의 의미를 거꾸로 되묻게 한다. 과연 그가 말한 ‘정의’는 무엇이었으며, 그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사법이 추구해야 할 정의는 사회의 신뢰와 법적 형평의 회복에 있다.연속된 이례성으로 점철된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은 사회적 신뢰와 법적 형평 회복에 기여한 것이 있는가? 이 사건의 절차를 살펴보면 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