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정상회의서 보여준 정부의 외교력
훨씬 여물고 큰 나라의 힘 보여줘 자부심

APEC에 관한 묵은 잔상은 단체 사진이다. 크고 작은 나라의 우두머리들이 개최국 전통의상을 입고 주르르 서서 찍은 사진 말이다. 몇 해 전 외신에서 ‘우스꽝스러운 셔츠(silly shirts) 행사’란 기사를 보고 그 동네서도 그게 유난해 보였구나 싶었다. 태평양 너른 바다를 도래도래 끼고 앉은 나라들이 벌이는 영양가 고만고만한 계 모임 같은 것이라 가볍게 여기는 느낌 또한 엇비슷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리 간단치 않다. 이재명 정부는 이 친목 행사에 명운을 걸다시피 핏발을 세웠다. 다시 열강의 먹이다툼 틈바구니에 빠졌다는 위기의 느낌은 위정자건 백성이건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이 땅의 모두는 같을 것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가 된 참담한 심사로 경주와 김해공항을 흘깃거렸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법치와 같은 가치를 중히 여길 뿐 아니라 굶는 우리에게 밀가루와 강냉이를 퍼줬다. 총 쏘는 법에다 찬송가를 심어 주고 학교와 병원까지 지어줬으니 그저 감읍하여 하늘처럼 믿고 의지하던 형이 미국이다. 더러 뒷구멍으로 험한 짓도 한다는 소문이 들려 이따금 왼고개를 치기도했지만, 강냉이죽 맛을 아는 올드보이들에겐 여전히 키다리 아저씨이고 큰 바위 얼굴이었다.

그런 미국이 기품이고 나발이고 팽개치고 탐욕의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 트럼프 시대다. 아메리카 대통령 명색이 어제오늘 말이 다르고 약속을 눙치는 것은 예사며 거짓말이 천연덕스럽다. 이 느닷없는 브라더의 돌변이 심히 놀랍고 충격적이지만 붕괴하는 신뢰를 다독일 겨를도 없도록 공세는 노골적이다. 관세를 없애자 협약한 자유무역협정(FTA)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통관세를 독하게 매기는데 더해 3500억이나 되는 달러를 현찰로 내놓으라 을러댄다.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이웃에 두루 손을 내미니 원성이 자자하다. 마치 난전 바닥에서 자릿세 뜯는 건달의 행태다. 덩치 커진 중국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맞짱 뜨자며 거세게 나온다. 그래서 분위기 서늘해진 와중에 맞은 모임이 APEC이라.

미국 신문을 뒤져 반응을 살펴보니 “한국 대통령, APEC 정상회의에서 고위험 외교에 직면”이라는 제목의 기사(10월 28일 <워싱턴포스터>)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경주 정상회담에서 워싱턴, 베이징, 도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냉정한 분석이다. 깡패 짓이 어처구니없어도 훈장에 ‘금관’까지 진상해 헤벌쭉하게 만들고, 표정없이 항상 뚱한 옆집 곰의 냉담도 조크 한방으로 파안대소를 끌어내 ‘직면한 고위험’을 모면한 대통령의 분투는 돋보였다. 그러나 안쓰러웠다.

국정조사장으로 이어진 경주 APEC에 관한 여야의 평가는 예상대로다. 실리를 챙겼다는 극찬과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 외교라는 폄하 공방이다. 미국의 거센 협박과 압박에도 끈질기게 뻗대며 손해를 줄인 협상팀의 성과는 칭찬받아 마땅하고 구체적 합의 문안 이행까지의 숙제가 남았으니, 우길만하다.

뿌듯한 것은 내가 부대껴 살아오며 견줘온 위상보다 훨씬 여물고 크게 나라의 힘을 느낀 것이라. 빛의 혁명을 이룬 우리의 기술과 창발력, 번득이는 ‘끼’와 위세가 이제 어떤 오랑캐도 허투루 덤비지 못할 만치 견고한 수성의 무기로 작동한다는 실체감 말이다. 대첩을 이뤄낸 자부심에 다시금 차오르는 국뽕으로 단풍 지는 가을이다.

/홍창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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