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사법에 바라는 건 무엇보다 신뢰
서두른 정의는 종종 정의 가장한 불의로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국회 답변에서 인용한 이 문장은 사법의 책무를 강조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국회에서 이 말을 꺼낸 맥락은 되레 그 문장의 의미를 거꾸로 되묻게 한다. 과연 그가 말한 ‘정의’는 무엇이었으며, 그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사법이 추구해야 할 정의는 사회의 신뢰와 법적 형평의 회복에 있다.
연속된 이례성으로 점철된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은 사회적 신뢰와 법적 형평 회복에 기여한 것이 있는가? 이 사건의 절차를 살펴보면 답은 선명해진다. 대법원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하고, 기록 송부와 판결까지 불과 34일 남짓 걸린 것은 사법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천대엽 처장은 국정감사에서 “전합 회부는 원칙”이며 “내규상 3일 이내 송부 규정이 있다”고 했지만, 왜 하루 만에 송부됐는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서울고등법원장 역시 “그런 사례는 없었다”고 인정했다. “선거범죄라 신속하게 처리한 것 같다”고 덧붙였지만, 그 말은 곧 ‘예외적 신속처리’를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나아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선 직전에 특정 후보를 법적으로 단죄하려 한 대법원의 시도는 국민의 정치적 선택권을 본질적으로 훼손했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법원의 선언은 사건에 대한 판결이라는 외피를 썼을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유권자의 판단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대선 직전이라는 유권자의 시간에 사법부가 취해야 할 태도는 사법적 절제, 즉, 사법 소극주의여야 했다.
그러나 조희대 대법원은 그와 반대로 사법 적극주의의 길을 택했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34일 만에, 전원합의체라는 이례적 절차를 동원해 선언하려 했던 ‘정의’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단지 “허위 발언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금지규범의 선언이었는가, 아니면 “특정 후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는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상 이번 사건에서 가장 역설적인 문장이 되어버렸다. 정의는 속도가 아니라, 절차의 공정함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하루 만에 기록을 송부하고 한 달 남짓 만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리는 일이 사법 절차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이 사건은 검찰과 법원의 ‘선택적 정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보여준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수사와 기소가 달라지고, 재판의 속도와 무게가 달라진다면 정의는 권력의 부속품, 사법 시스템의 공허한 메아리로 전락할 뿐이다. 사법이 정치의 그림자 속에 들어서는 순간, 국민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진다. 사법부의 독립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독립은 외부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독립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정치적 함의가 큰 사건일수록 사법권의 행사는 더 신중해야 하고, 더 절제되어야 한다. 사법부의 정의는 일관성의 문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그것이 정의의 기본이다. 국민은 속도를 원하지 않는다. 국민이 사법부에 원하는 것은 법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신뢰다. 사법부가 그 신뢰를 되찾으려면,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닐 수 있지만, 서두른 정의는 종종 정의를 가장한 불의가 된다.
/박미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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