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야무야 넘기는 이주민 단속 인명사고
재발 막으려면 더 많은 연대·연결 필요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다녀온 지리산 아래 작은 마을, 신선한 공기, 웅장하게 솟은 나무들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빛 ‘감 요정’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 앞에 선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느낀다. ‘숲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큰 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작은 나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란다. 큰 나무는 때로는 옆으로 뻗어 작은 나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나무들의 뿌리는 서로 이어져 있다. 필요한 양분을 나누고, 위험을 알리며, 어린나무들을 돌본다. 햇빛은 나뭇잎 틈새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빗방울은 가지 끝을 타고 흙으로 내려가 생명을 적신다. 숲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연결의 질서와 공존의 지혜로 살아간다.
인간의 ‘숲’은 어떠한가? 나도 모르게 머리를 숙인다. 10월 28일, 한 베트남 이주여성 노동자가 사망했다. 미등록 이주민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또 한 번의 비극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 작업장에는 단속하지 말아주세요.” 늘 현장에서 반복되어 온 요청이었다. 기계가 가득한 공장, 소음과 열기 속에서 단속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놀라 도망치다 다치기 십상이다. 안 그래도 위험한 일터에 단속까지 더해지니, 사고 위험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법무부는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책임을 느끼지도 않았다.
국가와 권력의 작동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다면, “불법이니까 도망치지 말았어야지”라며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폭력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우리의 무관심이 이러한 폭력을 조장하고, 또 다른 동원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심각성을 느낀다. 인간의 ‘숲’은 땅속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할 뿌리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나무들, 작은 풀, 꽃, 그리고 숲을 이루는 다른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는 웅장한 큰 나무들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법에는 어떤 이유로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개인 대 개인의 폭력 사건에서도, 한쪽이 다른 쪽을 때리면 폭력이 되고 맞은 쪽이 다시 때리면 쌍방 폭력으로 사건이 접수되고 처벌받게 된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왜 이주민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에는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이 다쳐도, 사람이 죽어도 모두 허용된다는 것일까? 너무나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번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한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가 다시 조용해질까 봐 사실 두렵다. 시민단체는 사건을 최대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고자 현장에서 발버둥치며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뒤돌아서면, 같은 사건이 또 발생하고 있다. 사건 재발을 근절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 이주민 인권단체들의 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연대와 연결이 필요하다.
나는 이주민 문제를 칼럼 형식으로 나름대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스스로가 메마른 상태임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의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연결 꼬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풍성함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의 ‘숲’을 상상해본다.
/리샤오나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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