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사와 농촌문화가 생겨나고 얼개가 짜진 바탕을 모두 중국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런 일이 생긴 것은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한국 고대사를 부정·왜곡한 일본 학자들과 그들을 도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의도적인 짓이었다.중국 기록인 을 비롯한 몇몇 중국 기록물에 겨우 몇 줄 정도 나와 있는 한국 고대사 내용을 따르면서, 한국 고대사는 오로지 중국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자랑하듯 해왔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문자가 없다 보니 중국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그들에게
농사는 하늘의 것을 땅에서도 이루어내는 일이고, 농촌은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곳이다. 신과 인간, 인간과 만물 관계의 평등, 모두 함께 사는 신명을 이상이 아닌 현실의 기쁨으로 누리는 삼위일체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과 시대와 사람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다. 산업화 이전 수천 년 동안을 "농사천하지대본(農事(者)天下之大本)"이라 부른 까닭이다.지금 우리는 고작 300년 남짓한 산업화의 물질중심주의가 만든 편하고 이익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자본과 권력의 사슬에 짓눌려서 쓰레기나 토해내는 소비자라는 괴물이 되고 있
제11대 정기국회에서 1987년부터 단계적으로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 뒤로 이 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1985년 여름, 서울의 한 계간지에서 '공동체와 지방자치'를 주제로 한 특집을 실었다. 김학준(서울대 정외과 교수), 한상범(동국대 헌법학 교수), 전지용(조선대 사학과 교수), 노경채(고려대 사학과 강사) 그리고 필자도 맨 뒤에 이름을 올렸다. '마을 단위 자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이었다.기존 해 온 마을 단위 지방자치를 해보자는 매우 구체적인 제의였다. 도시 지역은 그 나름의 특징과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
독일 사람 슈펭글러가 쓴 은 역사철학으로 분류된다. 서양의 도시는 농촌이라는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문명이라 했다. 처음엔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성장을 보듯 볼만했으나 나이 들수록 차츰 괴물로 변질되었다. 나중에는 어머니의 살과 뼈, 영혼까지 수탈하여 철근과 콘크리트로 비만해져서는 어머니도 자식도 함께 몰락한다고 썼다. 1930년 이전의 글이다.이런 그의 견해에는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농촌문화에 대한 아널드 토인비의 와 좋은 비교가 되는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도시의 발생과 성장이
농사와 농촌에 관한 이야기를 되는 대로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농사짓는' 것의 철학적 바탕과 문화와 땅 사이에서 비롯된 인류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분명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곳이 농촌이었고, 그 일이 농사였다.이 두 가지 기억은 모두 사람 마음에 남아서 이른바 산업화의 오물찌꺼기로 급변하고 있는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노스탤지어가 되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이 되어가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죽어야 옳지 않겠나 싶어서이기도 하다.'농사짓는' 일은 무엇을, 누가
'망종(芒種)'은 자연의 변화에 때맞춰 농사(農事)하려는 옛사람들 마음의 시간표에 적혀 있는 비밀신호였다. 자연의 변화를 예감하여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옛사람의 우주철학적 발견이기도 했다. 농사는 하늘의 일을 땅에서도 이루어내려는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어 자못 상서롭기도 했다. 농사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끊임없는 관계와 변화로 이루어진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여정이기도 해서, 단순한 육체적 노동과 약간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행위로 규정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했다.그러면서도 농토에서 거두는 수확물이 먹고사는 양식이
구월아지매는 우리 동네로 시집온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그분 이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남편과 자식들 말고 동네 사람은 그저 구월댁, 진두 마느래, 영이 즈그매, 선동이 즈그 할매라 부른다. 남편은 김진두, 딸내미는 김영이, 손자는 김선동이라 부르면서 구월아지매만 구월댁이다. 남편은 85세. 작년 여름부터 치매를 앓아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월댁은 남편의 그 망각의 시간 위에서 지난날을 낱낱이 떠올리며 84세 노년의 봄날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서 울먹이는 날이 많다. 도로 확장으로 집 앞 논이 거의 잘려나가고 귀퉁이
우리 삶은 매우 작고 하찮은 것들로 이뤄진다. 행·불행도 지극히 사소한 것이 그 바탕이다. 그 사소함의 밑바닥에 욕심이 깔렸다. 권력욕구가 채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먼저 욕하고 비방하다가 폭력을 쓴다. 폭력은 전쟁의 씨앗이다. 전쟁은 인간을 증오와 원한으로 내몰고, 증오와 원한은 행복을 빼앗아버린다. 문제는 욕심이다. 인간의 모든 것이 욕심을 어찌할 것인가에 달렸다.신라 때 원효(617~686) 스님과 진표(760년대 활동) 스님이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뒤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 당한 백제와 고구려 생존자들에게 온몸으로 외쳤던
우리 동네 김 씨는 여든한 살이다. 나를 부를 때 '정 생원'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저녁 어둠살이 내릴 때까지 거의 날마다 12시간 넘게 농사일을 한다.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병에 담아와서 마신다. 일하다 허기가 지면 삶은 고구마, 옥수수, 감자를 먹는데 가만 앉아 쉬면서 먹지 않고, 먹으면서 일을 계속한다. 휴식 시간이 따로 없다. 어떤 경우에도 품삯을 주고 일꾼을 구해 쓰지 않고 김 씨 내외가 다 해치운다.김 씨 이름으로 등기된 땅은 논 800평과 콘크리트 주택이 있는 대지 150평이 전부다. 그런데도 올가을 농협에서 사들이는
필순 씨는 술도가를 하던 아버지의 여자밝힘증이 저지른 과오의 설움덩어리였다. 때로는 오물덩이처럼 이리저리 아이고 떠밀려 다니면서 술도가 종년처럼 자랐다. 필순이란 이름은 아비 말에 반드시 복종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18살 되던 해에 남의 집 머슴살이하던 순한 총각한테 시집가서 올해로 66년 함께 산다. 필순 씨는 84세, 남편 김대구 씨는 87세. 필순 씨는 허리가 기역자인데, 보행보조기 없이는 나다니지 못하며 김대구 씨는 무릎과 허리가 탈이 나서 걷지 못해 바깥나들이 때는 전동차가 있어야 한다. 집안에서도 앉아서 움직여야 하고,
4월에 이어서 5월에도 농사에 꼭 필요한 만큼의 비는 내리시지 않고 있다.기상학자들의 걱정이 올해 가뭄은 평년의 6~8배에 이르고, 지구 온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북극지방에 사는 펭귄들이 얼음이 녹은 평지에서 최후를 맞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매우 낮다.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가 미친 듯이 폭증하는 속에서 돈과 편리와 권력의 지배력에 의존하는 사회적 변화는 농업의 중요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식량 위기는 이제 핵폭탄보다 더 가까운 생존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많은 이
'양심(良心)'의 '良' 자는 중국 문자인데 '량(liang)', '랑(lang)'으로 발음한다. 대략 19가지 뜻을 지녔는데, 14번째가 '타고 나다', '나면서부터 지니다'는 뜻으로 매김한다. 따라서 양심은 '타고난 마음' 또는 '나면서 지니고 온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양심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지니고 태어난 것이어서 사람이 나누거나 다르게 뜻을 매길 수 없다. 마치 수백 년 된 느티나무의 헤아리기 어려운 이파리처럼 그 모양은 저마다 조금씩 달라 보일지라도 느티나무 잎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참말이지 말들이 많다. 3월 9일 대통령 뽑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다. 날이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가벼운 깃털처럼 떠돌아다닌다. 악취와 살기가 서린 저주 가깝고 한국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저질 토악질이나 다름없는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걱정 많은 한국인들의 생활과 생각 구석구석을 파헤집고 들면서 꼬드기고, 코웃음치게 하고, 해코지하고, 역겹게하고, 한숨 토하게 하고, 마침내는 냉담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한다. 기껏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다. 꼬라지도 보기 싫다는데도 시시덕거리며, 능청을 떨며, 맘에도 없는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로 공정성을 잃은 경쟁의 모순을 말한다. 공정성이 중요한 것은 서로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공존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차이를 지녔다. 그 차이가 아름다움을 만드는 근원이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라는 철학은 허위다. 아름다움이 오만, 폭력, 위선, 증오와 다른 세계를 지닐 수 있는 바탕이므로. 공정이 지닌 힘은 인위적인 가치다. 평등과 자유를 인간 삶의 두 축으로 삼게 된 것 또한 사람들 약속에 뿌리를 둔 것처럼 공정도 그러하다는 말이리라.자유로운 경쟁 체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이야기는 화천대유, 천화동인 두 괴물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다. 화천대유, 천화동인 모두 사자성어로 구성되는 한문 문장 형식을 흉내내며 대륙적 이미지와 중국 문명 찬양론자들에게 그럴싸한 환상을 자아내게 하는 뻔뻔함의 블루스다.두 괴물 안에는 법 기술자들이 마술사로 복무한다. 그들은 우등생들이었다. 사법, 행정, 회계고시를 거친 맞아죽을 '사짜'들과 그들의 천박한 권위와 삼류 권력에 투항한 비인간적 노예들의 이야기다. 핵심 줄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변질과 변절을 거듭하면서 출현한 법의 죽음에 이르는 단말마
를 보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는 구절을 만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아 따른다'고 풀이되는 글이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그 어떤 특정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노자는 우주 발생에 관한 철학자가 아니고, 공자의 인위적 가치 체계가 인간사회를 계급화하면서 무한 경쟁과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 이치를 본받
2011년 마을 이장이 만들어 나눠준 마을 전화번호부에는 121가구가 전화를 가지고 있으며 가구주 이름 밑에는 아내 또는 아들 이름과 휴대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10년 지난 올봄에 새로 만든 전화번호부를 보면 98가구가 남고 23가구가 없어졌다. 가구주 내외가 다 죽고 자식들이 부모 살던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비워두다가 불이 나서 타버리거나 그냥 허물어진 채 버려둔 곳도 있다. 돌아올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고 부모 살던 집을 팔기보다는 그냥 두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해석이다. 결코 작은 동네가
'코로나19'에서 인류를 건져주리라 믿고 있는 '백신'의 효험에 대한 믿음은 거의 '백신(百神)' 즉 전지전능한 신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상처 위에 덧붙이는 '밴드'에 지나지 않으리란 부정론도 있다. 더 큰 걱정은 이른바 '백신 민족주의'의 현실화다.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인도, 미국, 영국 등은 자기 국가 국민 우선주의를 택했다. 영국은 한 사람이 세 차례 접종까지 하면서 사망률이 제로에 가까워졌다는 뉴스까지 나온다. 덩달아서 유럽 우월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에 백신 공급을 차단하거나 제한적으로 허용하
"스님께서 새로 온 두 남자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를 마시게.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왔었습니다. 차를 마시게. 보고 있던 원주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와 보지 않은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 하신 것은 그만두고라도 무엇 때문에 왔던 사람도 차를 마시라 하십니까? 스님께서 '원주야!' 하고 부르니, 원주가 '예' 하고 대답하자, 차를 마셔라 하셨다." 당나라 때 선종 수행자 조주종심(778~897)의 '끽다거' 법문이다."두 손자가 서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흐르다가 낮은 구덩이나 구멍을 만나면 반드시 구덩이를 채우고 구멍 끝까지 다 메꾼 다음 평평하게 한 뒤에 다시 흘러간다.가다가 흙탕을 지나고 독극물 섞인 더러운 곳을 만나기도 한다. 피하지 않고 다 쓸어안고 흐른다.흘러가면서 천천히 흙 속으로 스며들어 땅속 깊은 곳까지 닿아 지하수로 보태지기도 하고,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풀·나무들의 피 같은 양분이 되어 풀과 나무를 키운다.이때 물이 스며드는 흙은 물이 머금은 독극물과 썩고 문드러진 것들을 모두 품어 안아 삭혀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