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430주년 경남의 눈으로 본 7년 전쟁 (6) 전환

진주성 전투 패배로 전력 약화
명나라 참전으로 전황 급변돼
행주산성 전투서도 권율에 대패
한반도 침략 이후 병력 큰 손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참패 격분
재차 진주성 대대적 공격 나서

진주성 전투 패배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한반도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전쟁을 이어가려던 일본의 전략은 무너졌다. 정예 병력이 패배하면서 일본군 전력 또한 약화됐다. 경상도에 남은 일본군은 거점을 최대한 지키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김면의 낙동강 서부 회복 = 진주성 전투 이후 일본군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김면을 중심으로 한 의병대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최경회, 임계영 등 호남지역 의병들의 합류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1592년 음력 11월 하순, 김면은 일본군 제6군, 제7군의 주요 전진기지였던 지례지역(현 김천시 지례면)을 다시 탈환하고 본진을 지례현 석곡, 허곡으로 옮겼다. 이는 지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으로, 이곳을 통해 성주, 상주, 무주, 금산 등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제 김면은 낙동강 서부지역 일본군 최대 거점인 개령(현 김천시 개령면)과 성주를 탈환하고자 했다. 12월 14일, 개령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시 12월 25일 영동현감 한명윤 등과 연합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2월 말, 김면은 경상도 의병군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김면은 의병대와 관군 연합군을 통해 1593년 2월 5일 성주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성주를 포기하고 최후의 보루인 개령에 집결했다. 하지만 의병대의 공격이 이어지자 2월 19일 결국 낙동강을 건너 인동(현 구미시 인동동) 방면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낙동강 서부에 있던 일본군은 대부분 사라졌다. 경상도 의병 총대장 김면은 3월 13일 진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 서생포왜성 모습.  /부산박물관
▲ 서생포왜성 모습. /부산박물관

◇명나라 군대의 참전 = 한편, 북쪽에서는 일본군이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지만 조선군과 의병의 항전, 보급의 부족, 추위 등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애초 명나라는 조선이 일방적으로 일본에 밀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선이 패배하는 척하면서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연이어 조선에서 구원 요청이 오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자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이어 명나라 조정은 요동 부총병이었던 조승훈을 보냈다. 조승훈은 고작 기병 3000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1592년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대패해 병력 절반 이상을 잃고 말았다.

조승훈의 패배로 명나라 조정은 비로소 이번 전쟁이 심상찮은 전쟁이며, 일본군의 전력 또한 막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병력 4만 2000여 명을 보내 조선을 돕도록 했다. 이여송의 집안은 고려 말 평안도에서 요동으로 건너간 고려 계열 인사였다.

이여송은 1592년 12월 23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왔으며 1593년 1월 6일 평양성을 공격해 다음 날 탈환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퇴로를 열어 주는 조건으로 겨우 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명나라군은 여세를 몰아 개성을 탈환하고, 한양까지 탈환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걸려 이여송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렇듯 명나라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일본군의 시선이 분산된 1593년 1~2월, 김면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의병과 관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낙동강 서부 지역을 포기해야만 했다.

◇휴전과 제2차 진주성 전투 = 1593년 2월 11일, 일본군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에 대패했다. 2월 29일, 평안도·함경도·강원도 등 북쪽으로 향했던 모든 일본군은 한양으로 철수하고 향후 진로를 논의했다.

▲ 행주대첩도.  /전쟁기념관
▲ 행주대첩도. /전쟁기념관

일본군 수뇌부의 판단은 '더 이상 전쟁은 무리다'는 것이었다. 명나라 또한 일본군을 끝까지 몰아낼 의지는 없었다. 명나라도 더 큰 희생과 전쟁 비용이 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었다. 물론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일본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지금, 전력을 다해 공격하면 몰아낼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선에는 협상권이 없었다.1593년 초, 일본과 명나라 간 여러 차례 강화협상이 이어졌다. 일본은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의 후궁으로 삼고, 조선의 8도 중 중남부 4개 도를 넘기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명나라는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가고,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하라"고 맞섰다. 양측의 입장 차가 크기 때문에 협상은 지지부진해졌으나, 일단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고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는 데에는 합의가 이뤄졌다.

1593년 4월 20일, 한양에 모여 있던 일본군 주력군은 경상도 동남부 지역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그동안 빼앗은 수많은 물자와 포로를 데리고 갔다. 일본군은 부산, 울산, 진해 등에 거점을 구축하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 1·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투를 하는 가토 기요마사 모습.  /위키백과
▲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투를 하는 가토 기요마사 기록화. /위키백과

이순신을 수장으로 하는 조선 수군은 요충지인 한산도에서 거점을 잡고 일본 수군의 진격을 막았다. 조선-명나라군은 낙동강 서쪽 지역을 완전히 탈환하고 영천과 경주라인을 경계로 일본군과 맞대고 있었다.

1593년 6월, 한반도 동남부로 퇴각을 완료한 일본군은 남아 있는 병력을 파악했다. 이 결과 한반도를 침공한 일본군 15만 8700명 가운데 8만 74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약 45%에 달하는 병력이 손실된 것이다.

손실률이 가장 큰 부대는 처음으로 부산에 상륙해 서울과 평양을 공격한 제1군 고니시 부대, 제4군 모리 요시나리 부대(강원 방면),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황해 방면)였다. 이들은 절반 이상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후방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점령을 꾀했던 제6군(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7군(모리 데루모토), 제9군(도요토미 히데가쓰)은 총 병력 5만 6700명 가운데 2만 명 이상을 잃고, 3만 20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 조선군이 쓰던 다양한 화기.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  /임종금 시민기자
▲ 조선군이 쓰던 다양한 화기.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 /임종금 시민기자

그만큼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의병과 관군이 치열하게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번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조선 출정 지휘관들이 무능했다고 보고 영지를 몰수하거나 가문을 끊어버리겠다는 등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삭일 뭔가가 필요했다. 그들은 진주성을 다시 선택했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이 각지에서 모은 정예병 3만 명이 동원돼 1만 명이 죽은 '참사'였다. 진주성 전투를 지휘하던 진주목사 김시민은 훗날 일본 희극에 '모쿠소'라는 요괴로 등장할 정도로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593년 6월, 일본군 9만 2972명이 부산에서 진주로 향했다. 예비 병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한반도 주둔 일본군 전 병력이었다. 목표는 진주성의 완전한 말살이었다.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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