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해안으로 풀려난 일본
다시 침략할 기회 노리는데

임금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일본군 치려다 되레 당하고
거제 칠천량에서 궁지 몰려

1592년 음력 4월 13일 시작된 7년 전쟁은 1년간의 치열한 공방을 펼친 끝에 일본군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동남해안 일대로 물러나는 걸로 휴전을 맞았다. 하지만 길게 갈 휴전은 아니었다. 조선을 점령하고, 중국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장수 하나쯤은…" = 조선은 유가의 나라였다. '군군신신부부자자(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로 상징되는 역할극의 나라였다. 백성은 백성의 역할을 다했는데, 임금과 조정은 백성을 버리고 떠났다. 그냥 떠난 것도 아니었다. 한양과 평양에서 백성들을 지키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도망쳐 버렸다. 백성들은 분개했다. 

선조 임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과연 왕으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을까? 두려운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593년 5월 한양을 회복했으나 실제 선조가 한양까지 오는 데 무려 5개월이 걸렸다. 그 와중에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파동을 일으켜 약해진 왕권을 세우려 하였다.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가 끝난 후 휴전으로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창원·진해·거제·고성 등 일본군 주둔지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한 치라도 더 진출하려는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 교전이 간간이 일어났다. 그나마 제일 큰 교전은 1594년 음력 3월 4일 있었던 제2차 당항포 해전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이 해전에서 거제도를 약탈하는 일본군을 궤멸하고 함선 31척을 파괴했다.

1594년 4월, 선조는 조선 8도 모든 의병을 혁파하도록 지시했다.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들은 초기에는 자력으로 운영됐으나 활동이 이어지면서 관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에 배속되고, 관에서 군량과 무기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의병이라는 명목으로 세력을 모아 반역하는 것을 조정은 우려한 듯, 의병을 혁파하고, 김덕령을 수장으로 하는 충용군에 소속시켰다. 이때 정인홍·임계영·변사정이 이끌던 의병들이 모두 김덕령 휘하에 편제되었다. 김덕령의 충용군은 곽재우를 조방장으로 삼고,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을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김덕령은 이미 늦게 의병을 일으켰기에 그다지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김덕령은 최소한의 전투 병력만 두고 식량 생산을 위한 둔전을 시행했다.

원균의 목을 베는 왜장 고니시 모습의 상상도. /회본태합기
원균의 목을 베는 왜장 고니시 모습의 상상도. /회본태합기

1596년 드디어 선조 임금과 조정이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김덕령의 충용군은 이몽학의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던 중 이미 권율에 의해 이몽학의 반란은 토벌되었다. 그런데 이몽학은 반란을 일으킬 때 "충용장 김덕령과 곽재우·홍계남이 나를 도우며, 병조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세력을 모았다. 이어 이몽학이 죽고 난 뒤 그가 지니고 있던 문서에 '김, 최, 홍' 세 성이 적혀 있었다. 이몽학의 부하인 한현은 그 세 사람이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이라고 했다. 결국 김덕령은 한양에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김덕령은 명성에 비해 세운 공이 별로 없었고, 의병을 통솔하는 데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조정 대신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영의정 유성룡조차도 "뒤에 만일 생각지 않은 일(반란)이 일어난다면 이 같은 용맹한 자를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정언 김택룡이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가 주변으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비록 비웃음을 샀다고 하나 김택룡을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이순신 제거 작전 = 선조 임금은 자신과 달리 백성들의 인망을 사고 있는 이순신이 불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듯 이순신에게 수시로 출전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억지 출전 명령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원균은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대신들에게 이순신이 비겁하고, 자신이 나서면 일본군 본진을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조 임금과 대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진짜 용맹한 장수는 원균이고, 이순신은 원균과 부하 장수들의 닦달에 마지못해 출진한 것에 불과하다'는 공론이 오갔다. 이렇게 서서히 이순신은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1597년 초, 이순신은 작은 실수를 하나 하게 된다. 부하 장수들의 보고를 토대로 일본군 본진이 있는 부산에 잠입해 군량을 불태웠다는 전과를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는 다른 사람의 공이었다. 결국 선조 임금은 이를 계기로 폭발했다. 허위 전공을 보고함으로써 조정과 임금을 기만한다는 죄가 성립된 것이다.

정유재란 때 피난가는 조선 백성들 모습을 담은 그림. /회본조선정벌기
정유재란 때 피난가는 조선 백성들 모습을 담은 그림. /회본조선정벌기

일본 또한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작전에 나섰다. 이중간첩 요시라를 통해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간다는 사실과 일본군 병력이 부산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려왔다. 조정에서는 즉시 이순신에게 바다에서 가토를 막으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남해도에 갔다가 풍랑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미 가토는 부산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으나 일본군을 요격하지 못했다. 당시 수군이 풍랑이 이는 겨울 바다에서 배를 늘어놓은 채 한없이 일본군을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선조 임금은 지시에 따르지 않고, 허위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고, 애초에 전공 또한 원균과 부하들 것임을 단정 짓고 이순신을 파직했다. 그리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 임금은 국문을 통해 이순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우의정 정탁의 간곡한 만류와 당시 일본군의 재침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의종군 명령을 내리게 된다. 한편, 이때 이순신의 친구인 영의정 유성룡은 살벌한 선조 임금의 기세에 눌려 이순신을 전혀 변호하지 못했다. 

◇졸렬한 원균 = 1592년 음력 2월 16일, 원균은 드디어 이순신을 제거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원균이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가 일본군 본진을 쳐부수거나 혹은 일본에서 건너오는 일본군을 요격할 것이라 기대했다. 게다가 원균은 이순신이 비겁하고 자신은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고 숱하게 공언해 왔던 터였다. 선조 임금은 원균이 이순신과 함께 여러 해전을 치렀으므로 충분히 해전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균 또한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적이 언제 넘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없이 망망대해에 배를 늘어놓고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조정에서는 원균에게 '그렇다면 함대를 절반으로 나눠 2교대로 돌아가며 출격하면서 일본군이 부산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으라'고 작전을 지시했다. 하지만 원균은 이마저도 따르지 않았다.

칠천량 상황도

도원수 권율은 분노했다. 스스로 자신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쳐놓고선, 막상 아무런 움직임을 펼치지 않는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쳤다.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이 해군참모총장에게 곤장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곤장은 원균 휘하 부하가 대신 맞았다.

1597년 7월 7일, 원균은 할 수 없이 함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하지만 일본군 빈 함선 8척을 포함해 일본군 함선 10척을 파괴했으나 조선 수군은 무려 판옥선 32척을 잃는 피해를 봤다. 원균은 함대를 거제도 칠천량에 정박하고 술만 마실 따름이었다. 그 사이 칠천량 해협 좁은 양쪽 입구가 일본군에게 장악됐다. 조선 수군은 독 안의 쥐가 된 것이다.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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