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가을, 일본군은 명량해전과 직산전투에서 패했다. 비록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군의 전쟁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실익도 없는 전쟁에 염증이 난 일본군 지휘부는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으로 철군했다. 이렇게 7년 전쟁은 지지부진한 형국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명나라 입장에서는 더는 이 전쟁을 끌 수 없었다. 언제 일본군이 다시 병력을 보충해 진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고, 특히 명나라는 국력이 쇠락해 가는 과정에서 7년 전쟁으로 너무 큰 비용과 병력을 소모하고 있었다.◇진주성과 반대 상황 '울산왜성 전투'
일본은 7년 전쟁 2차 침공(정유재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이순신 제거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조선 조정도 이순신을 탄핵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이순신은 탄핵당해 백의종군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원균의 어설픈 지휘로 칠천량 해협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에게 완벽하게 포위되고 말았다.◇무너진 조선 수군 = 1597년 음력 7월 15일 오전, 길고 좁은 칠천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완벽하게 가두고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좁은 해협에서 일본군 습격을 당한
1592년 음력 4월 13일 시작된 7년 전쟁은 1년간의 치열한 공방을 펼친 끝에 일본군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동남해안 일대로 물러나는 걸로 휴전을 맞았다. 하지만 길게 갈 휴전은 아니었다. 조선을 점령하고, 중국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장수 하나쯤은…" = 조선은 유가의 나라였다. '군군신신부부자자(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로 상징되는 역할극의 나라였다. 백성은 백성의 역할을 다했는데, 임금과 조정은 백성을 버리고 떠났다. 그냥 떠난 것도 아니었
1592년 음력 4월 13일부터 시작된 7년 전쟁은 1년간의 치열한 공방을 펼친 끝에 일본군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동남해안 일대로 밀려났다. 좋게 말해 원점이고, 일본군 처지에서는 패배한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 일본군은 남아 있는 전 병력을 이끌고 희생양으로 지목된 진주성으로 향했다.◇10만 대군에 외롭게 맞서는 진주성 = 1593년 음력 6월 14일, 일본군은 남북으로 나눠 진격했다. 남쪽 방면은 창원을 격파하고 진주로 향했으며, 북쪽 방면은 6월 15일 함안을 점령하고 선거이, 권율 등
진주성 전투 패배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한반도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전쟁을 이어가려던 일본의 전략은 무너졌다. 정예 병력이 패배하면서 일본군 전력 또한 약화됐다. 경상도에 남은 일본군은 거점을 최대한 지키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김면의 낙동강 서부 회복 = 진주성 전투 이후 일본군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김면을 중심으로 한 의병대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최경회, 임계영 등 호남지역 의병들의 합류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1592년 음력 11월 하순, 김면은 일본군 제6군, 제7군의 주요 전진기지였던 지례지역(현 김천시
1592년 가을,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북으로는 명나라의 참전이 임박했으며, 남으로는 전라도 침공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데다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다는 완전히 봉쇄됐다. 경상도에서도 의병의 활약으로 낙동강 보급선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경상도 서부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경상도 중동부 지역인 현풍, 영천, 창원까지 내주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선택했다. 진주성을 점령한다면 전라도로 가는 길이 열리고, 나아가 일본군을 괴롭히는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의병 활동을 이끈 사람은 바로 김면이었다. 김면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5월 초순으로 초유사 김성일이 5월 4일 함양에서 의병활동을 독려한 뒤 본격적으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면은 자신의 근거지인 고령을 중심으로 안음(현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 함양, 산청, 단성(현 산청군 일부), 삼가(현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일대)와 멀리는 의령에서까지 의병을 모았다. 이를 통해 불과 며칠 만에 의병 2000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1592년 음력 5월 2일, 한양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 전쟁 발발 불과 20일 만이었다. 이렇게 쉽게 한양을 빼앗긴 것은 일본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할 경상도 지역이 너무나 쉽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각 지역 수령들은 예상을 벗어난 일본군의 침공 규모에 놀라 도망치는 일이 잦았다. 연구에 따르면 전쟁 초기 경상도 지역 수령 67명 가운데 도망친 것이 확인된 것만 25명에 이르렀다. 이는 김성일의 장계에서도 잘 나타난다.◇초유사 김성일의 활약 = "본도(경상도)의 순찰사는 상경하였고, 병사에게는 군사가 없고, 수사는 병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진 첨사 정발은 조선으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목격했다. 그는 급히 병사를 모으고, 인근 주민을 부산진성으로 대피시켰다. 약 500~800명의 병사와 2000명 남짓한 주민이 성에서 농성을 준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1진은 4월 14일 새벽 부산진성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고니시는 공격 직전 정발에게 항복을 권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정발은 전령의 목을 베었다.◇'50:1' 압도적 차이 = 일본군은 조선군이 성벽 아래 뿌려 놓은 뾰족한 마름쇠 때문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전열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하 '7년 전쟁')은 조선, 일본, 명나라의 운명이 갈린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명나라와 조선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장악하게 된다. 일본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2년 뒤 사실상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에도막부 시대로 접어든다. 이러한 거시적인 결과 이면에는 7년 전쟁의 핵심 전쟁터였던 경상도와 경남이 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지역의 시선에서 7년 전쟁을 고찰하고, 7년 전쟁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임종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