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430주년 경남의 눈으로 본 7년 전쟁 (5) 진주성 전투

곳곳 저항에 고전하던 일본군
전라도 침공 발판 진주성 향해

1592년 가을,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북으로는 명나라의 참전이 임박했으며, 남으로는 전라도 침공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데다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다는 완전히 봉쇄됐다. 경상도에서도 의병의 활약으로 낙동강 보급선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경상도 서부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경상도 중동부 지역인 현풍, 영천, 창원까지 내주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선택했다. 진주성을 점령한다면 전라도로 가는 길이 열리고, 나아가 일본군을 괴롭히는 조선 수군을 육지에서부터 압박할 수 있으며, 경남 서부 내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병의 배후를 노릴 수 있었다.

▲ 현 진주성 전경.
▲ 현 진주성 전경. /임종금 시민기자

◇장단점이 뚜렷한 진주성 = 진주성은 평지에 세운 성이지만 산성 못지않게 방어력이 높은 성이다. 일단 성 남쪽으로는 남강이 자연 방어벽을 형성해준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잡고 있으므로 부산에 있는 일본 수군이 남해안을 거쳐 남강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성 서쪽과 북쪽으로도 하천이 흘러 천연 해자 역할을 한다. 게다가 북쪽과 서쪽은 완전한 평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 경사가 있는 언덕이었기에 적이 넘어오기 쉽지 않다.

하지만 진주성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지금 진주성은 사실상 내성만 있는 상태지만, 조선시대에는 동쪽으로 긴 외성이 존재했다. 게다가 1591년, 일본의 침공이 우려되자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다시금 동쪽으로 외성을 확장했다. 성벽이 길어지면서 성벽을 수비할 병력이 최소한 1만 명은 되어야 했다. 병력이 부족해 성벽에 병사가 없는 곳으로 적이 넘어오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당시 김시민과 진주성 수비군은 고작 3800명에 불과했다. 다만 진주성이 넓기에 주민 수만 명도 함께 있다는 것이 수비군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 과거 진주성 동문이 있던 장대동 놀이터.
▲ 과거 진주성 동문이 있던 장대동 놀이터. /임종금 시민기자

◇김시민의 결단 = 1592년 음력 9월 24일, 김해성에서 대기 중이던 일본군 약 3만 명이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주성 공격을 위해 보급품을 모으고 배불리 먹인 일본군 정예병력이었다. 일본군 선봉대는 창원 노현(현 창원시 성산구 동읍 신방리 일대)으로 밀려들었다. 이곳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병력 2000명으로 일본군에 맞섰으나 패하고, 창원성도 곧바로 빼앗겼다. 창원을 휩쓴 일본군은 9월 26일 함안을 점령했다. 조선군과 의병들은 일본군 별동대나 소규모 병력에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지만, 대규모 병력과의 정면 대결은 아직 감당하기 힘들었다.

배후를 다진 일본군은 10월 5일, 1만 명을 보내 진주성 동쪽 마현(馬峴·말티고개)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창원을 빼앗기고 퇴각한 유숭인이 병력 1400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 앞에 도착했다. 유숭인은 진주성 입성을 요청했다. 하지만 유숭인이 진주성에 들어올 경우 김시민이 짜 놓았던 방어 전술이 흔들릴 가능성이 컸다. 유숭인(종2품·경상우도병마절도사)이 김시민(정3품·진주목사)보다 직급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시민은 유숭인의 입성을 막았다. 김시민은 유숭인에게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주장(主將·유숭인)께서는 밖에서 응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냉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를 전해 들은 곽재우는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라고 김시민을 높이 평가했다. 유숭인은 별수 없이 진주성에서 물러나던 중 일본군을 만나 전사했고, 이끌었던 병력 또한 궤멸됐다.

▲ 진주성 북쪽 성벽. 진주성은 근본적으로 평지성이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br /><br /> /임종금 시민기자
▲ 진주성 북쪽 성벽. 진주성은 근본적으로 평지성이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임종금 시민기자

◇모두의 승리, 완벽한 패배 = 1592년 음력 10월 6일,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시작했다. 김시민은 부녀자까지 남자로 변복해 성벽 위에 세워 빈틈이 없게 했다. 일본군의 주 공격로는 동문이었다. 일본군 주력 3부대 모두 동문과 동북지역 봉명루(현 의병루)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공격했다. 전투는 4일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와 성벽 높이로 망루를 만든 뒤 바퀴를 달아 성벽에 접근해서 활과 조총을 쏴댔다. 조선군은 현자총통을 쏘아 망루를 파괴했다. 일본군은 소나무 가지를 모아 성벽 주위로 흐르는 하천 및 해자를 메우고 건너려 했다. 김시민은 이를 간파하고 화약 뭉치를 던지고 불을 붙여 일본군이 모아 놓은 소나무 가지를 모두 불태웠다.

일본군이 성벽에 육박하면, 성내 주민들이 큰 돌과 끓는 물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최대한 화살을 아끼게 했다. 또한 소규모 총통을 사용해 근접해 오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군도 조총을 쏜다"고 놀랐다고 한다.

밤에는 곽재우, 최경회(호남 의병) 등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본군 진지 외곽에 출몰하면서 일본군을 쉬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의병들의 기습을 염려해 병력을 집중하지 못했다.

 

긴 성벽에 수비병 턱없이 부족
김시민 전술 주민 수만 명 동참
치열한 공방전 끝에 극적 승리
전력 상실 일본군, 공수 바뀌어

 

10월 9일, 이날부터 10일까지 일본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토산을 쌓아 올려 성벽으로 총탄을 무수히 쏴댔으나 다시금 현자총통으로 토산을 붕괴시켰다. 10월 10일 새벽 1시경, 일본군은 각 막사를 불로 태우며 짐짓 퇴각하는 척 조선군을 유인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군이 유인에 걸리지 않자, 새벽 2시경 전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 1만 명이 동문을 집중 공격했고, 조선군 및 주민들이 총력을 다해서 동문을 막는 사이 또 다른 일본군 1만 명이 북문 방면으로 공격을 했다. 북문은 한때 일본군에 점령될 위기에 처했지만 최덕량, 이납, 윤사복 등 일선 지휘관들이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이때 주민들 가운데 노약자들까지 돌과 불붙인 물건을 던져 성 안에 기와, 돌, 초가 지붕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0월 10일 날이 밝자 일본군은 총공격을 멈추고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숨 돌린 김시민은 성안을 순시하다 시체 더미에 숨어 있던 일본군 저격수가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전투를 수습했다. 10월 10일 정오 무렵, 일본군은 몰고 온 소와 말마저 버리고, 시신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조선군은 지친 나머지 일본군을 뒤쫓지 못했다.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과 의병,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완벽한 승리였다. 또한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은 김시민과 조선군이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외에도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과 의병 사이 전투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10월 9일 새벽, 진주성을 우회하기 위해 단계(현 산청군 신등면) 방면으로 진출하던 일본군 2000여 명은 김준민에게 격퇴당했고, 살천(현 산청군 시천면) 방면으로 진출하던 일본군도 의병장 정기룡에게 막혔다.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로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전개했던 모든 전략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라도 점령은커녕 경상도에서도 동남부 거점을 중심으로 공세가 아니라 방어전에 나서야 했다. 일본군은 지금까지 점령한 곳을 지키기 급급한 신세가 된 것이다.

드디어 공수가 바뀐 것이다.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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