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쟁의·여성단결 이끈 주역, 김계정·제영순·조복금 등 3인
부산 방직회사서 탄압에 저항 좌우합작 근우회 하동지회 활동

남편, 오빠, 남동생, 또래 여성과 함께 민족독립을 꿈꿨다는 것이 하동지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공통점이다.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 여성단체가 함께 모여 만든 근우회 활동을 한 인물도 눈에 띈다.

◇우리는 노동자다 = 하동 출신 김계정(1914~?)과 제영순(1911~1992)·조복금(1911~?)은 모두 1931년 부산 조선방직회사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김계정은 17살, 제영순과 조복금은 20살이었다.

부산 조선방직회사는 1917년 일본 자본이 설립한 대규모 공장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었다. 한국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2시간 이상 일해도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 수준이었다. 산업재해에도 무방비 노출돼 있었다. 여성 노동자는 더 열악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노동자의 60%밖에 임금을 못 받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성차별과 식민지적 민족차별, 자본가의 노동력 착취라는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살았다.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일제의 노동탄압이 더 심해졌고 노동자들은 쟁의행위를 벌였다. 김계정은 1931년 부산총파업 사건에 참여했다. 이듬해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기관지 <봉화>를 배포하다가 붙잡혀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불기소(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김계정은 김계영·태영·두영 3형제 여동생이다. 4남매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8년에 결혼한 남편 한인식 역시 셋째 오빠 김두영 친구로 항일투쟁 동지였다.

▲ 지난 2014년 들어선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공원. 지난해 서훈되고 최근에 발굴된 하동지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 제영순·조복금은 동갑내기로 친구일 가능성이 크다. 둘은 근우회가 창립된 이듬해부터 활동했고 나란히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일했다. 근우회는 1927년 창립된 항일여성운동단체다. 서울 중앙본부와 여러 지회로 구성됐고 본부에서 매년 전국대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임했다. 전국 조직망을 갖추고 당시 경남에서는 1928~1930년 김해, 진주, 밀양, 동래, 부산, 하동, 기장, 마산, 통영, 양산, 고성, 울산에서 지회가 설립됐다. 1929년 기관지 <근우>에 발표된 경남의 지회는 8곳(전국 40곳), 회원은 623명(전국 2870명)이다. 근우회에서 경남지역 참여 회원 규모가 가장 컸음을 엿볼 수 있다.

<근우> 창간호(1929년 5월)에는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는 결기 가득한 선언이 담겼다. 아울러 행동 강령에는 △봉건적 인습 타파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 철폐 △부인 노동자 임금차별 철폐 △산전산후 휴양 △부인 농민의 경제적 이익 옹호 등 요구를 실었다.

▲ 부산 조선방직주식회사 파업 모습. /〈항도부산〉(부산시청)

◇"무서울 정도로 강인했던 어머니" = 제영순은 1928년 근우회 하동지회 서무재정부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6월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회 여자부장과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이후 1931년 조선공산주의재건협의회 <노동자> 신문을 인쇄·배포하다 체포,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32년 1월엔 대구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해 불기소(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1933년 남해공산주의자전위연맹과 적색교육노동조합의 연락을 담당했다.

제영순 남편 전석순도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지난해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지만 반려됐다.

딸 전정자(75) 씨는 어머니에 대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무서울 정도로 강인했던 분"이라고 했다. 전 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홀로 노점상을 하며 오빠와 저를 키웠다. 그야말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6년 만에) 뒤늦게나마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아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독립운동가 조복금. /하동군

◇동지들과 남긴 발자취 = 조복금은 1928년 7월부터 1930년 6월까지 근우회 하동지회 서무재정부, 정치연구부 대의원,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회 여자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영순과 1931년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다 체포, 징역 5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듬해 대구에서 하동 출신 권대형(건국훈장·2005)과 같이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했고 뜻을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다 체포돼 불기소(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3년 전북교원비사(秘社)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동갑내기 제영순·조복금은 3살 아래인 김계정과 언니·동생 사이였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일하며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서 활동했다.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는 1931년 7월 만들어졌다. 전국에 적색노조·농조·독서회·사회과학연구회 등을 조직했고 1932년 3월 권대형 등 18명이 구속되면서 깨졌다.


※참고문헌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1996), 박용옥, 지식산업사

논문 <부산지역 노동운동 역사:1930년대 전반기를 중심으로>(1993), 권혁주, 숙명여대

논문 <부산 조선방직 쟁의 행위에 따른 노동법 제정에 관한 연구>(2016), 이창규, 항도부산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2018), 이임하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철수와영희

논문 <해방직후 경남지역 여성운동조직과 여성운동>(2008), 임정연, 동아대

독립기념관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sajeok.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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