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매 '제국주의 침탈'비판 한목소리

하동 옥종면 월횡리 출신 조복애(趙福愛·1918~?·사진)에 관한 기록은 아직 풍부한 편이 아니다. 그는 1941년 숙명여자전문학교 재학 중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비판하는데, 이듬해인 1942년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정도가 전부다. 오랫동안 공부한 사실과 민족의식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서훈 신청을 했다.

그의 오빠와 남동생도 독립운동가였다. 오빠 조정래(1914~1935)의 삶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는 1931년 2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결국 고초를 겪지만, 이후 동경으로 유학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 독립운동가 조복애. /하동군

신병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오는데, 조선반제동맹·적색노동조합 조직을 협의하고 공장과 학교에선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을 알렸다.

특히 1932년 12월 중순 동경에서 열린 태평양연안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대회에 가게 되는데, 당시 동지들과 논의한 구호는 '타도 일본제국주의, 조선어 본위의 교육시행,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국유임야의 민중공유, 조선절대독립' 등이었다. 이런 구호를 들고 회의에 참여한 조정래는 1933년 1월 19일 오사카에서 검거된다.

그는 징역 4년형을 받고 복역했지만, 건강 문제에 따른 집행정지로 1935년 5월 20일 석방됐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동생 조옥래(1922~?)도 1941년 일본으로 유학,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러나 1943년 4월 일본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까지 1년여 옥고를 겪었다. 조옥래의 이름도 여태까지 독립유공자 명단에 없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1996), 박용옥, 지식산업사

논문 <부산지역 노동운동 역사:1930년대 전반기를 중심으로>(1993), 권혁주, 숙명여대

논문 <부산 조선방직 쟁의 행위에 따른 노동법 제정에 관한 연구>(2016), 이창규, 항도부산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2018), 이임하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철수와영희

논문 <해방직후 경남지역 여성운동조직과 여성운동>(2008), 임정연, 동아대

독립기념관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sajeok.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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