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사회 전통에 여러 지역 상차림과 계층문화 모두 버무려진 통술·다찌·실비

마산통술

"마음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무거워지는 건 내가 나그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소주잔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객들은 배를 두드린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이 따로 없다." -여행블로거 산짱

통영다찌

"통영엔 말이야 다찌라는 술집이 있는데, 소주만 시키면 갖은 해산물로 입과 위가 잔치를 열지. 나폴리라니, 통영은 말이야 이처럼 찬 겨울에도 포근하지." -소설가 J 씨

"다찌집은 술만 파는 곳이 아니라 인심까지 파는 곳이다." -술 평론가 허시명

진주실비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독일에 있다 온 아들놈이라 맥주는 안주 없이 먹어도 괜찮은데 하면서도 화려한 안주에 연신 잔을 비웁니다." -블로거 마님44

01.jpg

◇술은 팔되, 음식을 나눠라 = 남해군 남해읍 남해전통시장 뒷길의 '남면집'. 40세부터 38년간 여기서 하루 한 말씩 막걸리를 빚어 팔고 있는 김선이 씨는 아직 건강하다. 장이 선 오전 나절부터 문을 연 가게는 북적이진 않으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장 본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적시고 서둘러 떠난다.

안주랄 게 없다. 무와 열무김치가 전부다. '탁배기' 한 잔만 내어주기 미안해 주는 것이니 안줏값도 없다. 이처럼 우리 농경사회의 전통은 술은 사고팔되 음식은 거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길손을 맞아 밥을 먹이는 일은 의무에 가까웠다. 없는 세간에 자기 밥을 내어 주며 '차린 것 없어 죄송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익숙하다.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이것이 우리 술 문화의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술은 팔되 밥(음식)은 나눠 먹는 것. 그 원형을 간직한 곳이 바로 경남의 통술·다찌·실비다.

◇한양 선비, 바다를 만나다 =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선조는 경상·전라·충청의 수군절도사를 통합 지휘하는 통제사 직제를 신설하고 본영을 통제영이라 칭한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여수, 거제 등지로 옮겨 다니던 통제영은 선조 37년(1604) 지금의 통영시가지 지역에 자리를 잡는다. 세병관 등이 세워진 것도 이 시기다. 이로써 300년간 이어질 통영 통제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이품인 삼도수군통제사는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이다. 뱃사람을 천하게 보던 조선시대, 척박한 바닷가 작은 고장에 온 한양의 고위 관료.

궁중의 그것에 미치진 못할지라도 99칸 사대부가의 화려한 상차림에 익숙한 그에게 통영은 어떤 상을 내었을까? 한양 양반가의 차림새가 통영의 해산물과 만나는 순간이다. 싱싱하지만 투박한 통영의 상차림은 한양의 상차림을 만나 풍성해진다.

◇싸게, 간단하게 = 일본의 전통 선술집 다치노미(たちのみ)는 '서서 마신다'는 뜻이다. 이는 자경농 사회에서 임노동(賃勞動)이 일상화한 변화와 관계가 있다. 퇴근길 노동자들이 싸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다치노미'는 일본 특유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맞물려 널리 퍼진다. 큰 공간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간단한 안주와 함께 서서 마셨다. 일본 근대의 풍경이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기와 맞물린 대한제국의 근대화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와 학생들도 비슷한 선술집 문화를 접하게 된다. 통영 다찌의 '다찌'는 바로 이 '다치노미'에서 온 말이다.

항구 노동자들의 선술집이 '술은 팔되 음식을 나눠먹는' 우리 농경사회의 전통과 결합해 '다찌'가 되었다.

◇한 상 차림 = 일본에서 '요정'이라 하면 지역의 특징적인 맛을 살린 요릿집을 말한다. 요정은 일본 기생이라 할 수 있는 '게이샤'와 결합해 대표적인 접대문화로 뿌리내렸다. '다치노미'가 서민 술상이라면 '요정'은 상류층 술상이다. 우리 기방문화와 비슷한데,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건 남성 중심 사회의 흔한 풍경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마산의 밤은 '요정'이 밝혔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씨도 자주 이용했던 곳이 마산의 요정이다. 정경유착과 접대의 무대였던 요정은 마산의 쇠퇴와 함께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통술이 들어왔다.

흔한 안주로 싸게 즐겼던 마산의 실비문화는 요정과 만나 통술로 태어났다. 타지에서 손님이 오면 횟집보다 통술로 가 접대를 하는 것도 이런 기억의 산물이다. 농경사회의 전통, 일본의 선술집과 요정, 마산의 바다가 한 통에 담겨 비로소 '통술'이다.

◇통섭의 술상 = 이처럼 통술·다찌·실비는 여러 지역의 음식문화와 계층문화가 만난 결과다. 이들이 서로 밀어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으니 그 차림이 풍성하고 열려 있다. 군산과 전주에 비슷한 형태의 주점이 있다곤 하나 사천, 통영, 진주, 마산 등지에 고루 발달한 경남에 비할 것은 아니다. 바다와 접해 문물의 교역이 활발했던 영향이다. 이는 경남사람 특유의 유연하고 호방한 기질의 탄생과도 관계가 깊다.

'융합'과 '통섭'의 술문화인 통술·다찌·실비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술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통영에 '반다찌'가 생기자 마산에 '미니통술'이 생긴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02.jpg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