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상무사, 인근 17군을 관할하던 물류 집산지

“기갱꺼리가 업떤 시절에 중앙시장이 젤루 기갱거리가 많은 데였제. 장에 오면 오만 사람들이 다 쏘다지는데, 벨벨 일도 많았다아이가. 신기한 것 만코, 사람도 젤 많은 데였으니께. 하동에서 시집와가꼬 여게 시장 처음 왔을 때, 아이구 여가 무신 벨천지 인줄 알았다아이가. 세상에 이런 시상도 있구나 싶었제.”

지난 10월 8일 시장 길목에서 만난 김화자(76·이현동) 할머니는 새댁 시절 처음 본 장날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지 목소리가 커졌다.

LG․GS 그룹도 이곳 포목점에서 출발

진주중앙시장은 오래된 전통 문화의 도시 진주 경제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은 경남 서부지역의 농․수․축산물의 집산지이자 유통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한 이른바 경남 서부의 유서깊은 시장이다. 이곳 시장을 돌다보면 군데군데 오랜 전통과 역사를 홍보하는 것이 제법 눈에 띈다. 공영주차장 안 휴게소에는 이곳 시장의 옛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1910년대의 장날 풍경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진주중앙시장 100년사(1982년 출간)에 따르면 이곳은 전국 5대 시장으로 꼽혀왔다.

1913년 진주중앙시장 장날

근대시장으로서의 진주장에 대한 기록은 진주상무사에 보존되어 있는 <사전청금록·1884>에 잘 나타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상남도에는 진주에 상무회의소를 두고 임금의 지시와 인장과 개혁할 내용들을 내려 보냈다. 당시 진주에는 ‘우도반도수(지역의 우두머리 부보상)를 두어 북으로는 거창, 함양 남으로는 남해, 통영 등 인근 17개 군을 관할하게 했다. 또 매매되던 물류에 따라 포전(포목), 어과전(생선, 과일), 금전(비단), 지전(종이) 등을 분류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이건 근대 시장으로서의 기원이다. 그 이전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됐다고 한다. 진주상무사는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으로 당시 사용하던 건물은 이곳 시장과 인접한 옥봉동에 아직 남아있다. 이 건물은 지난해 제533호 경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현존 상무사 건물은 천안시와 진주 2곳 뿐이다.

이곳 시장은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모태이기도 하다. LG․GS 그룹의 전신인 럭키금성 그룹 ‘구씨, 허씨 집안이 이곳 시장에서 출발했다. 진주의 60대 이상 어른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진주중앙시장 100년사에 따르면 럭키금성 그룹은 1931년 창업주인 故구인회 명예회장이 이곳 시장에서 작은 포목상을 열었다. 이후 해방직후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세우며 사업을 확장한 구회장을 사돈지간인 진주의 만석꾼 허만정 씨가 찾아가 출자를 하면서 LG․GS 구허 동업이 시작됐다. 풍수가들은 진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남강은 재와 부를 상징해 재벌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더러는 이 풍수설을 좇아 기업인이 된 사람이 많다고도 한다.

지역·민중문화를 꽃피운 곳

진주중앙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가 유통되는 곳이었다. 옛 시장에는 볼거리와 놀거리가 있었는데 놀이패, 공연패, 풍물패가 5일장을 찾아 공연을 하고 그 속에서 고유의 시장문화를 꽃피웠다.

진주중앙시장 옛모습_나무전거리

일제강점기, 이곳 시장 근처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까지 시장 근처 가옥들을 살펴보면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인 다다미집을 쉬이 볼 수 있었다 한다. 시장 근처에 소재하고 있는 천왕식당이 10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식 건물이라는 것은 관광객들에게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장을 둘러싼 외부환경과는 상관없이 이곳 중앙시장에는 독립된 상인들의 자치와 공동체가 있었고 그에 따른 고유의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1년 365일 지역문화, 민중문화를 펼칠 수 있는 마당이 펼쳐졌고 시장은 그런 문화를 보호하고 이어오는 해방구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923년 형평사운동의 시발지인 옥봉리교회(현 봉래동 진주교회)가 바로 지척에 있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지역민들은 한결같이 “진주중앙시장은 128년 그 긴 역사만큼 ‘경남 최대의 곳간’이었고, 민중문화의 산실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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