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반열에 오른 영화중에는 ‘음악이 감동의 두께를 더하는’ 명장면이 종종 있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교도소장 방에서 문을 잠그고, 운동장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내보내는 신은 그 대표적인 예다. 화자(話者)인 레드는 그 때 이렇게 말한다. “그게 무슨 음악인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 우리들은 자유를 느꼈어요!”

폐쇄된 교도소에 울려퍼지는 아리아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곡이 ‘누가 만든 어떤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교도소라는 공간을 싸안는 음악이 있다는 게 포인트다.

개인적으로는 모차르트도 좋았지만, 이때 주인공 앤디가 튼 곡이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Giant Steps>였다면 어쨌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숨쉴 틈없이 흘러나오는, ‘바라바라’하는 색소폰 소리가 더 가슴을 저미지 않았을까?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음악은 흔히 취향이라고 한다. 이 말에는 내가 골라서 듣는다는 ‘자유의지’가 강조돼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정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음악은 취향이 아니라 습관이다. 특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것처럼 초년 시절 각인된 음악은 평생을 좌우하는 정서가 된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듣는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는 클래식에 대한 친밀도가 높다. 반면 팝 음악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은 그 반대다.

Horace Silver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릴 때 어떤 음악을 많이 접했느냐가 청장년기 나아가 노년기 까지 이어지는 취향을 결정한다. 거장으로 꼽히는 재즈 기타리스트 래리 코리엘(Larry Coryell)은 “마일스 데이비스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롤링 스톤스도 좋아한다”고 했다. 래리 코리엘 같은 재즈 명인이 롤링 스톤스를 좋아한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자랄 때 롤링 스톤스를 늘 들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힙합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말했는데,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 프리뮤직 외길을 걷는 아티스트중에 박재천이 있다. 부인 미연과 듀엣으로 활동 중인데,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게는 팝 이모션(Pop Emotion)이 있습니다.” 팝음악에 대한 향수랄까 추억이랄까! 그런 감정이 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 또한 어릴 때 늘 팝음악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주로 재즈를 듣긴 하지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직도 카펜터스(Carpenters)나 패티김 음악이 나오면 ‘참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원래 그렇게 시작한 음악여정이 재즈에 닿았을 뿐이다.

빅터 전축으로 듣던 LP

70년대 초반 집에는 ‘빅터’ 전축이 있었다. 개가 커다란 스피커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상표로 유명한 오디오기기다. 그리고 싸구려 LP가 수십 장 있었다. 이중에는 쥬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의 이태리 가곡집, 세레나데 모음집을 비롯해 클래식 음반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사이몬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을 비롯한 팝음반도 꽤 됐다. 출발은 여느 여염집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the manhattan transfer

변화가 시작된 건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좋은 오디오기기를 갖추고 음악을 즐겨듣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덕분에 좋은 음반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음악저변을 넓혀가던 중 만난 기인같은 친구는 그중에서도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친구가 건네준 게 크림(Cream)이니, 퍼시픽 개스 앤 일렉트릭(Pacific Gas & Electric)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는 마하비슈느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음악도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 감성이 내겐 딱 맞는 옷 같았다. 홀로 남겨진 조용한 교실에서 크림의 명곡 <Sunshine of Your Love>를 들었을 때다. 한마디로 전율이 느껴졌다. 마하비슈느 오케스트라의 명반 <Birds of Fire>는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묘했다.

상식(?)을 파괴하는 격렬한 연주, 장조 화성에만 익숙한 뇌구조를 통째로 흔드는 멜로디. 재즈 기초는 이렇게 잡혔다.

재즈 덕에 폭넓어진 음악감상

내가 지닌 재즈 감성을 설명하면 이렇다. 파헬벨의 <캐논(Canon>을 예로 들어보자. 클래식-악기가 무엇이든-연주로 들으면 그저 그렇다는 느낌 밖에 안 든다. 그런데 우에하라 히로미가 스윙감을 잔뜩 실어 피아노로 이 곡을 연주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자유자재로 꺾어지는 리듬이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든다.

되돌아보면 팝음악이란 구조를 토대로 온갖 장르의 음악을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재즈라는 탑을 세운 셈이다. 때문에 재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른 음악을 경원시하는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이력 덕분에 재즈를 더 폭넓게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단골 음악카페에선 스테파노의 <무정한 마음(Catari)>에 온전히 몸을 맡긴다. 백발가 같은 국악 단가는 약주 한잔 할라치면 늘 흥얼거리는 레퍼토리다. 배호의 절창(絶唱)이 돋보이는 올드 뽕짝은 지인들이 “야! 비슷하네!”할 정도로 즐겨 부른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리듬감 없는 맹숭맹숭함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도 드뷔시나 쇼스타코비치는 훌륭한 스승이다.

음악 스펙트럼이 다양하면 그것들이 부딪히는 교차지점에서 가외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좋아하는 팝음악 중에 <Rikki Don't Loose That Number>라는 곡이 있다. ‘쿵(쉬고) 따다’하는 도입부분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한데, 재즈를 들으면서 이 부분이 피아노 연주자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의 <A Song For My Father>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 느꼈던 쾌감이란! 재즈의 자유찬가 <Nuages>는 또 어떤가? 구성이 독특해 애청하던 맨하탄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의 <Clouds>가 이 곡을 확대 편곡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흡사 커다란 금맥을 캔 기분이었다.

음악은 장르를 초월한다

레드가 한 말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게 무슨 음악인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 우리들은 자유를 느꼈어요!” 주인공 앤디를 제외한 대다수 수감자들은 척 보기에도 무뢰한들이다. 그런 친구들이 모차르트를 알 리 없다. 하지만 그들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자 얼어붙은 듯 눈과 귀를 집중시킨다. 비상(非常)한 공간과 비상한 시점에서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설사 주인공 앤디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틀었더라도 수감자들은 비슷한 ‘자유 감정’을 느꼈으리라!

음악은 장르에 우선한다. 단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것은 다들 ‘자기만의 음악여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즈라는 정박지에 닻을 내린 나는 <Giant Steps>가 아니더라도, <쇼생크 탈출>에 조 자비눌(Joe Zawinul)의 <Money In The Pocket>이나 쳇 베이커(Chet Baker)의 <My Funny Valentine>이 나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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