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15세 되던 1926년 발표한 동요 <고향의 봄>이다. 어릴적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이 곡은 너무나 포근하고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은 31세 되던 1942년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발표한 사람이기도 하다.

질곡의 삶 살다간 아동문학 대표 작가일 뿐

'지원병 형님들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중략) '반자이(만세의 일본말)'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두 시는 이원수 선생이 발표한 작품이지만 한국적 정서 면이나 정체성 면에서 확연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두고 친일 행적이 있었던 이원수 선생의 기념사업저지 창원시민대책위와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창원시의 '이원수 작품 브랜드화'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기념사업회 측은 지금까지 10년간 진행해 온 사업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지금까지 기념사업에 동의하고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 전체를 기만하고 시민의 대의기구인 창원시의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창원시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여기서 한가지 짚을 것은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념관 건립이나 문학상 제정, 동상 제작, 도시 브랜드화로의 활용과 같은 항구적인 기념사업을 할 때는 해당 인물의 공적이나 업적은 물론, 인물의 도덕성, 청렴성 등을 꼼꼼히 따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이라도 도덕성과 청렴성에서 흠집이 있다면 민심이반이라는 국민의 냉혹한 심판을 받아 왔다.

특히 1945년 해방 후 격동기의 역사를 지내며 친일 행위나 친일 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비판이 부족했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더군다나,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다.

친일 행적 등의 이유로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 음악관이 마산 음악관으로, 가고파를 지은 이은상의 호를 딴 노산문학관이 마산 문학관으로 명칭이 바뀐 사례도 있다.

이원수 선생의 친일 활동은 민족문제연구소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났으며 지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에 이원수 선생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밀어붙이기 식 통합 창원시 상징화 부적절

이원수 선생이 한국 아동 문학 역사에 남긴 업적과 영향을 고려한다면 애석한 일이지만 이제라도 역사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진행해 온 사업이라도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순리다.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창원시는 지금이라도 지난 10년간 진행해온 사업이니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에서 벗어나 사회적 합의를 얻기 위한 시민과의 소통의 장을 마련했으면 한다. 시민적 공감대나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은 불필요한 논란만 확산시킬 뿐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억압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근현대 한국 아동 문학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이원수 선생이 재조명 되었으면 한다.  

/김지수(민주당 창원갑지역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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