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문화를 꿈꾸는 민들레

이성민 씨는 극단 새벽에서 상임 연출을 맡고 있다. 극단 새벽은 지금 부산 중구 대청동 부산근대역사관 뒤쪽에 있다. 극장은 없고 사무실만 있다. 4월 30일까지 6년 동안 이어진 광복동 시절에는 사무실과 극장이 모두 있었다.광복동 일대는 80년대만 해도 부산 대표 상권이었다. 그 뒤로 공동화 현상을 보이다가 2000년대 들어 옛 도심 살리기가 진행됐고 2010년을 전후해 확 되살아났다. 상권의 부활이 모두에게 좋지는 않았다. 건물 주인들이 먼저 임대료를 올렸다. 극단 새벽 건물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인상폭이 극단 새벽의 지불능력을 넘어섰다.극단 새벽은 이렇게 해서 광복동 시절을 접었다. 이들은 이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역 다른 역량과 연대해 문화 공간을 아예 새롭게 하나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극과 음악을 겸하는 극단 새벽

7월25일부산한술집에서열린대안문화센터민들레의꿈마련을위

광복동 고별 공연 작품은 <노래가 있는 연극 -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였다. 30대 이상 세대의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는 어린 세대의 표상이다. 지금 어린 세대는 새로운 조건에서 어렵게 살아간다. 태어나서 10대까지는 입시 학습 노동에 시달리고 20대에 들어서면 비정규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어린 세대를 위해 30대 이상 세대가 마련한 무대가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이하 철영콘)였다. 홈스쿨링을 하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10대 영희와, 입사 시험에서 꼬박꼬박 떨어지며 찌들려 사는 20대 철수를 내세워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며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내용이다. 30대 이상 관객들은 이를 보면서 어린 세대에게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한 책임을 느낀다. 철영콘은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철영콘에서 단원들은 손수 악기를 연주하고 몸소 노래를 불렀다. 이런 바탕에 음악 활동을 하던 둘이 더해져 인디(독립) 밴드 액트(ACT)가 꾸려졌다. 이들은 대안문화공간을 마련하는 전령(傳令)이다.

지금과는 다른 대안문화를 만들자는 제안

이성민 연출가 /김훤주 기자

10일 대청동 극단 새벽 사무실에서 이성민 연출가를 만났다. 그이는 창단부터 지금까지 극단 새벽과 함께해 왔다.

“부산에서는 당장 대안문화공간인 ‘민들레의 꿈’ 건립이 목표가 되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전국화하는 데 관심이 더 있어요. 이를 위해 인디 밴드 ACT의 전국 순회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창원에서도 11월에 할까 합니다. 순회 공연을 통해 대안문화공간의 필요성과 대안문화운동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한편 해당 지역에서 이런 공간을 운영하고 있거나 마련하려는 모임 또는 움직임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요.”

이성민 연출가와 극단 새벽이 벌이는 대안문화운동은 좀 많이 낯설다. 극단이 하는 문화운동이라면 연극이나 열심히 제대로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싶은데 말이다.

“운동의 영역이 요즘 되게 다양해졌지만 문화운동은 오히려 예술운동으로 축소됐습니다. 부산은 노조에서도 문화부, 문화부장이 사라졌어요. 있어도 노조 집회 프로그램 짜는 정도밖에 아니었고….
문화가 뭡니까? 살아가는 모든 것이 문화잖아요. 문화란 교육·언론·예술 등이 종합된 삶의 양태입니다. 문화운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고 행복한 삶일까?’

일은 생존과 행복을 위한 것인데 이러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 일하고 여유를 만들어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사회적인 활동을 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워낙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고, 자기 여유가 없는 삶이 일반적이지요. 맞벌이나 주말 부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데, 집은 한 채 마련해야 되겠고, 어느 정도 자산도 축적돼 있어야 할 것 같고 하니까 그러지만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는 어지간히 높은 임금 수준이 아니면 그러기 어렵지요.

문화운동은 삶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운동입니다. 세상에 일반화돼 있는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운동입니다. 이런 대안 공동체와 자치 공간들이 전국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노동 개념도 다르게 접근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일하는 식으로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죽자고 일하는 것과 다르답니다.”

그이는 대안문화공간이 할 일로 대안 교육·독립언론·인디 예술을 든다. 대안사회 연구 모임도 만들고 의료 품앗이 등도 함께한다. 하지만 주력은 교육·언론·예술이다.

“비정규직이 갈수록 일반화되는 악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잔업·특근을 더 하려 합니다. 그렇게 벌어 쓰는 가계 지출을 보면 교육비가 가장 큽니다. 아이 대학까지 보내려면 엄청납니다. 세상 사는 데 필요한 것들, 사람과 관계 맺고 자기 가치관을 세우고 이웃들과 관계 속에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인식들이 교육 속에 안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좋은 대학 가서 엘리트 직업군에 속해야 한다’만 남았지요. 언론은, 소식이 제대로 전달되고 올바르게 소통돼야 합니다. 한국 언론은 90% 이상이 자본과 권력의 나팔수입니다.

오른쪽 이상민 연출가

 갖은 예능, 오락, 드라마는 현실을 망각하도록 만듭니다. 실제 삶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주고 일상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대리 만족을 주는 데 더해 자의식을 잊게 만듭니다. 텔레비전 광고는 거짓말 투성이입니다. 삼성이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말하는데, 실제 경영에서는 매우 반환경적이고, 최대한 덜 인간적이고, 몰생태적이잖아요? 예술은 엔터테인먼트사에 장악돼 대중의 욕망을 포기하는 상품으로 변질됐습니다. 문화센터는 대기업이 제대로 활용하지요. 백화점 문화센터를 자본이 추구하는 문화가 뭔지 보입니다.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정치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을 대표해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 정치인데, 일반의 의식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 할 때는 포기하거나 강제해야 합니다. 강제하면 독재가 되고 포기하면 무기력해집니다.”

전국 곳곳서 대중 참여 대안문화공간 마련해야

극단 새벽은 <대안문화연대 ‘민들레의 꿈’>이라는 법인도 8월 11일 만들었다. 첫 사업은 대안문화센터 ‘민들레의 꿈’ 건립이다. 여기에는 16억 원이 필요하다. 극단 새벽은 가난하다. 어떻게 거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기금 조성은 대중적으로 하려 합니다. ‘대중적으로 기금을 모은다’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실제 모금 액수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16억 원 모으기는 쉽습니다. 1억 원씩 16명만 모이면 해결됩니다.거기에 더해 은행 융자도 좀 받고 하면 되지요. 대신 다달이 1만원 내는 (후원)회원 1000명 모집은 기본 목표입니다. ‘천원의 기적’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변주해 대중적 참여를 촉진하겠습니다. 한 번 천 원, 일주일에 천 원, 한 달에 천 원 하는 식으로요. 극단 새벽과 인디 밴드 액트 공연 수익금은 전액 기금으로 들어갑니다. 10~11월 전국 순회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주제를 달리 정해 이를테면 강정 마을이나 쌍용자동차 문제를 갖고 공연을 합니다. 경남에서 하면 밀양 송전철탑 문제가 되겠지요. ‘민들레의 꿈’이 갖는 정체성이 그들이니까…. 어쨌든 모델케이스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보고 ‘아 저게 되네’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요. 하하.”

전국 순회 공연은 힘이 많이 든다. 그런데도 하는 까닭이 단순히 모금에만 있지는 않다. 생각을 알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집단과 연대를 하는 바탕을 만들기 위해서다.

“전국화하려고 생각은 합니다. 조직 헤게모니는 아니고요. 지금 헤게모니는 자본주의 시장주의 문화에 있습니다. 노동과 소비와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주의 문화가 이른바 소비를 부추기니까, 소비 안 하면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특정 상품 특정 브랜드를 갖고 있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깁니다. 광고의 기만에 넘어가는 것이지요. 소비를 위해 죽어라 일하고 또 이를 정상으로 생각하고,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는 일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게 한다는 취지이지요. 이미 하고 있는 데도 있습니다. 지역마다 대중이 스스로 뭘 만들어나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어떤 사람의 흐름’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데, 바로 이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대안문화를 체득하고 사는 극단 새벽 단원들

이상민 연출가

얘기를 듣다보니 극단 새벽 단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은 누구에게나 있다. 세상의 삶을 바꾸자는 사람이 정작 자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만들 때 창단 10년까지는 내가 책임을 지겠는데 그 뒤로는 극단이 공동 자산이 돼서 운영되고 같이 살아가는 작업 공간이 돼야 한다고 약속했어요. 약속대로 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삽니다. 다르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비정규직이 일반화돼 있는 시대를 사는 비정규직들이 임금을 올리는 투쟁은 투쟁대로 하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같게 살아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살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서울에서는 7~8명이 모여 같이 자취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1명보다 7명이 사는 것이 낫기 때문이지요. 자치공동체라 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 닥친 어려운 현실에서 나온 것인데요, 의식적으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채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거 안 사 써도 내가 사는 데 크게 상관 없다’는 자각이 있으면 됩니다.극단 새벽에 연립주책이 세 채 있어요. 하나는 결혼한 단원이 살고 다른 한 채는 나머지 단원들이 공동생활을 합니다. 한 채는 다른 사람이 살 때부터 세 들어 있는데 계약 끝나면 공동생활 공간으로 편입할 생각입니다.”

아울러 그이가 살아온 이력도 말해달라고 졸랐다. 그이는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뜸을 조금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1955년 태어났는데 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뇌염을 크게 앓아 3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지요. 병동에 40명 남짓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둘만 살아났다더군요.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갔어요.

   

특수 케이스였어요. 예일대학에 스카웃 형식으로 오픈 코스라고 연극학교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밀도 있는 연수를 마치고 3학년 편입을 하는데 죄 지은 것 같더라고요. 때려치웠습니다. 박정희 독재가 계속되고 학생들이 잡혀가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조금 우스개인데 영어를 더 깊이 공부하는 것도 싫었고요. 진보적인 학자들이 연극학교 코스를 개설해 아시아 지역 젊은이들을 참여시켰어요. 모두 열넷이었는데 일본, 인도, 베트남 청년도 있었습니다. 노암 촘스키도 강의 들어오고 했습니다. 문화인류학이나 이런 부분 강의를 하셨지요.

전태일이라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린,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틈틈이 중학교 과정 야학을 나갔습니다. 열아홉 살도 안 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와서 일하는 여공이 참 많았습니다. 저도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고 밑바닥 삶에 대한 동병상련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민주주의로 향하게 만들었어요.

79년 5월 귀국했는데 6월에 영장을 받았어요. ‘6·25 특별 징집 대상’이라고…. 문제 될 인물을 골라 집어넣은 거지. 6월 25일 입대했어요. 82년 4월 1일 제대할 때까지, 부마항쟁, 박정희 피살, 전두환 집권, 80년 광주가 이어졌어요. 대구 50사단에 있을 때 삼청교육대가 시작됐습니다. 정상으로 안 보였습니다.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 ‘사랑과 평화’의 구성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것들이 저한테 쌓여 왔습니다.

이런 연극을 하고 세상과 싸우고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러다 보니 풍물패 만들 때 관계했던 김주익·박창수 같은 가까운 사람(후배)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모두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박창수는 감옥에서 의문사했으며 김주익은 투쟁 도중 자살했다) 저와 한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제대하고 서울 있을 때 구로공단 전기 부품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무슨 현장 활동을 위해서가 아니고 연극을 하려니까 먹고 살려고 들어갔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비인간적이어서 노조를 만들었는데, 뒷조사를 하더니 위장 취업했다면서 해고를 했어요. 자꾸 싸우고 현장 동료 만나고 하니까 수배 떨어져서 부산에 잠깐 왔어요. 84년 2월이었지요. 집에 와 있는데 갑갑해 죽겠는 거라. 상호가 ‘가스등’이던 카페에서 ‘목요 만남의 날’을 기획해 진행했어요. 마당극 동아리 학생들을 주로 만났는데, ‘전통예술연구회’ 이런 것을 만들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다 후배들이 극단을 하나 만들자 했고 한두 달 사이에 극단 새벽이 창단됐어요. 창단하도록 도와주고 서울 갈 거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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