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이 술술] 〈이승만 사임 성명 전후 마산에서의 시위〉(2025)
이창현 신라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 발표
3.15의거 때 거리로 나선 노인들 이야기
2차 시위 후 휴교령으로 발 묶인 학생 대신
마산 지역 할아버지, 할머니들 거리로 나서
"3.15의거 주역으로 역사적 의미 부여하기 충분"
[학술이 술술]은 우리 지역에서 나오거나, 지역을 다룬 학술 논문, 연구 보고서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연재입니다. 배움은 모두의 것이니까요.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몽고정 근처에 3.15의거 기념탑이 있다. 3.15와 관련한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기념탑은 1962년 7월 10일 세워졌다. 탑과 함께 세워진 청동 인물상은 3.15의거의 주역인 남녀 학생이 앞장서고, 그 뒤를 중년의 시민이 따르는 형상이다. 하지만, 3.15의거에 또 다른 주역으로 노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난해 12월 6일 마산 3.15아트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3.15의거 64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이창현 신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3.15 당시 고령층이 주도한 시위가 있었고, 학생과 시민 시위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는 민주화역사상 보기 드문 노인 시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보완해 이 교수가 올해 논문 〈이승만 사임 성명 전후 마산에서의 시위, 할아버지·할머니, 부산 원정 데모대의 시위를 중심으로〉(2025)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다.
◇마산 유교 할배들 "갈아치울 때는 왔다" =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께,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 바다에 김주열 열사 시신이 떠올랐다. 오후 6시 무렵,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 앞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13일까지 이어진 3.15 제2차 의거다. 이후 국가 공권력은 데모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마산 중·고등학교는 제2차 의거로 인해 17일까지 휴교 상태였다. 18일엔 다시 학교 문을 열었는데, 무장 경찰이 배치됐다. 19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 날 경상남도 학무 당국은 23일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3·15의거 핵심 주체였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때 학생들을 대신해 마산 애국노인회 회원 70~80명이 거리로 나섰다. 회원들은 주로 고령의 남성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이들을 1946년 1월 결성된 우익 반탁 단체 우국노인회의 후예로 추측했다.
"시위를 한 애국노인회는 1946년 1월 결성된 우익 반탁 단체 '우국노인회(憂國老人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1946~1948년 보도에 '애국노인회(愛國老人會)'라는 이름으로도 보도되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보도에 '우국노인회'라는 제목 하에 애국노인회 창립 4주년을 기념한다는 기사로 미루어볼 때, 애국노인회는 우국노인회라는 이름으로 1946년 1월 결성하였고, 두 명칭이 혼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 〈3.15의거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부산시위대 마산원정 시위' 시위 참여 및 인권침해 확인 사건〉 조사보고서 중에서)
이 교수는 이들을 1954년 4월 11일 새롭게 조직된 단체로 봤다. 이들은 친목 도모와 고령층 교육, 유교적 덕목 장려 등을 목표했다. 설립 이후 1959년까지 지역 내 효자·효부·열녀 등 유교적 덕목을 실천한 자에게 상을 줬다. 1955년엔 한 회원이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축시를 지어 입상하기도 했다. 마산 애국노인회는 3.15 부정선거 전까진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단체였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마산 애국노인회는 시위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1960년 4월 24일〈국제신보〉 '노인 데모' 기사에서 애국노인회 한 회원은 "젊은 아이들이 죽었는데 우리들이 앉아서 있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마산 할배 시위대'는 24일 오전 11시 영창인쇄소 앞에서 출발해서 남전(한전 모태·남조선합동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에 다다랐다. 남전 앞에선 경찰들에게 표어 제작물을 뺏기며 제지당하기도 했다. 다시 행진을 시작한 시위대는 낮 12시 40분 구마산 남성동파출소·콘티넨탈다방·북마산파출소·무학국민학교 앞을 지났다. 오후 1시 40분 포교당에서 자진 해산하며 시위를 마무리했다. 이들이 내걸었던 구호는 다음과 같다.
"노(老) 대통령은 요번 기회에 민주 정치를 바로잡자/ 책임지고 물러가라 갈아치울 때는 왔다/ 행방불명자 색출하라/ 체포 학생 석방하라."
◇마산 할매들 절규 "죽은 자식 내놓아라" = 다음 날인 25일 마산 할매들도 함께 나섰다. 이들은 특정 단체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구호 제작물에 '마산시 노인협회 단부'란 단체명이 발견됐지만, 추가 정보가 밝혀지지 않아 형식적인 표현으로 짐작된다.
할머니들은 오전 11시 구마산 강남극장 앞에 모였고, 1시께 애국가를 부르며 북마산으로 걸었다. 북마산파출소와 시청에 들린 뒤 오후 3시 넘어 마산경찰서에 도착했다. 여기서 "고문 경관, 살인 경관의 즉시 체포 인도"라고 외쳤다. 일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죽은 자식 내놓아라"고 울부짖었다. 이들이 만든 구호 제작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은 학생 책임지고 이 대통령 물러가라/ 흐지부지할 수 없다 믿지 못하겠다/ 총 맞아 죽은 학생 원한이나 풀어주소."
경찰은 고령층 시위대를 진압하기보다는 회유했다. 할아버지에겐 술을, 할머니에겐 사이다를 내밀며 시위 중지를 권했다. 이에 한 할머니는 "이놈의 자식, 내가 네 사이다 먹고 싶어 이러는 줄 아느냐"라고 항의했다. 이날 '마산 할매 시위대'는 단순 행진에서 더 나아갔다. 경찰서를 찾아 3·15의거 가담 학생 살인 행위를 규탄하고, 가해 경찰관 처벌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위에서 죽은 이들을 마치 자식처럼 여기며 시위를 벌였다. 이 교수는 이를 두고 "김주열 시신 발견 전후 자식을 잃은 데에 공감한 여성들의 시위 참여 확대와 연결된다"라고 분석했다.
3·15 의거 전후 마산 할매·할배 시위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지역 공동체 이웃이 겪은 불행을 두고 볼 수 없어 촉발된 시위였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책임을 최고 집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리면서, 정권 퇴진을 주장했기에 3·15의거 주역으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백솔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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