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과 3.15의거 65주년]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에 분노
남여 없이 학생들 집회 앞장서
할아버지·할머니도 시위 동참
"국가 불의에 맞서는 마음 뭉쳐"
3.15정신 민주주의 위기에 주목
1960년 3.15의거는 1차(3월 15~16일), 2차(4월 11~13일), 3차(4월 24~27일)에 걸쳐 펼쳐졌다. 그 중심에는 마산상고 김주열 열사로 상징되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은 아니었다.
평생 시위라고는 해본 적 없는 할아버지·할머니, 여중고생, 넥타이 멘 회사원도 그 거리에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분노하는 마음만은 하나였다. 세대·남녀·계층을 뛰어넘은 65년 전 3.15의거는 12.3 내란 사태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현재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하얀 저고리 입고 =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를 보면,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는 마산에서 3차 시위가 있던 4월 24·25일 이틀에 걸쳐 각각 일어났다. 경남 각지에서 시위 관련자가 대거 체포되고, 독재정권 감시와 휴교령 및 통행금지령으로 단체 행동이 억제되던 기점에 촉발됐다.
24일 오전 11시 '애국노인회'는 마산시외버스주차장 주변에 집결해 펼침막을 내걸었다. 시위 주도자는 갓과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50대 이상 남성이었다. 이들이 내건 펼침막에는 '이번 사건에 민주정치 바로 잡자', '책임지고 물러가라 갈아치울 때는 왔다', '행방불명자 색출하라 체포학생 석방하라'고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 시위대 규모는 최소 70~80여 명에서 최대 2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젊은 아이들이 죽었는데 우리가 앉아서 있을 수 있느냐"며 오전 11시 40분께 마산시청 방면으로 행진했다. 여기에는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후 분노가 폭발한 마산시민 3만~5만 명도 합세했다.
시위대는 낮 12시 남선전기 마산지점 부근에서 무장 경찰에 제지됐고, 펼침막을 빼앗겼다. 다만 경찰은 노인이라 강경 진압하지는 못했다. 무장 경찰 철수 후 사복형사들이 현금을 건네면서 시위 중단을 사정했다. 물론 먹히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구마산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남성동파출소-북마산파출소-무학초등학교-천부교 전도관을 거쳐 부림동 청과시장 앞에서 오후 2시 30분께 해산했다. 시위 시작 3시간 30분 만이다.
이튿날인 25일에는 '할머니 시위'가 이어졌다. 할머니들은 오전 11시께 구마산 강남극장 앞에 모였다. 이들은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 '협잡선거 물리치자', '흐지부지할 수 없다', '믿지 못하겠다', '총 맞아 죽은 학생 원한이나 풀어주소'라고 쓴 펼침막을 들었다.
할머니들은 하얀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시위에 나섰다. 참여자 규모는 최소 200명에서 최대 400명으로 추정된다. 시위 주도 단체는 파악되지 않는다. 시민도 함께했다. 수천 명에서 3만 명이 합류했다. 시위대는 여러 펼침막을 앞세워 북마산을 거쳐 마산시청 일대에 이르렀다. 시위대가 마산시청에서 마산경찰서로 향하자, 경찰은 음료수와 물을 건네주며 회유했다. 해산을 종용했지만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시위대 일부는 마산경찰서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리 아들들과 죽은 자식들 내놓으라", "고문 경관 잡아내라", "살인 경관 잡아내라", "구속자 석방하라"고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할머니들은 민주당 마산시당 앞에서 시위 시작 5시간 후 해산했다.
◇여학생들 거리로 = 여학생들 또한 3.15의거 한 축이었다. 마산여자고등학교, 성지여자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 학생들이었다. 앞서 마산 인근 진해여고·진해중학교 학생들이 먼저 거리에 나왔고, 마산 여학생들이 이를 이어받았다.
마산지역 여학생들은 수업 도중 거리로 나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성지여고 재학생 신분으로 3.15의거에 참여한 이영자(82)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학생들이 팀을 이뤄 시위를 주동했는데, 윤락 여성들도 참여를 했어. 선거를 다시 하라고 외치며 시위하고 있는데 총알이 막 날아오더라고. 성지여고 학생이 총에 맞았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실제 우리 학교 2학년 학생이야. 나중에 김주열 어머니는 머리가 산발인 채로 온 시내를 헤매더라고. 내 아들 찾아달라고. 그걸 보는 우리는 마음이 찢어지는 거지."
시위에 나섰다가 교직원에게 뺨을 맞은 일도 기억했다. "우리 성지여고는 고등학교도 있고 밑에 중학교도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까지 다 따라나왔더라고. 마산 운동장에 전부 다 모여서 시위할 준비를 하는데 다른 학교 교감이 내 뺨을 탁 치더라. '네가 제일 주동자다, 네가 시위하자고 꼬아서 우리 아들을 다 데리고 나가려 한다'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학교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아느냐, 목숨 걸어놓고 하는 아이한테 지금 뺨을 때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막 따지고 그랬어요."
이처럼 전 세대를 아우르는 힘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것으로, 연대의 힘이 발휘된 것이다.
김영달 3.15의거희생자유족회 사무국장은 장년층 항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학생들이 분노해 나서는 걸 모두 지켜봤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특히 손녀·손자뻘이 목숨을 잃고 다친 뒤로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늘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움직였던 거죠."
주임환 3.15의거기념사업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양한 계층이 시위에 나서게 된 배경은 쌓일 대로 쌓였던 특권층을 향한 불만 때문으로 보입니다. 어려웠던 사회 밑바닥 계층은 매우 힘겨운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특권을 쥔 사람들은 부정선거까지 시도한 거죠. 이를 보고만 있기 어려웠던 겁니다. 강압적인 경찰 수사와 취조에 내 동생과 친구들이 당하다 보니 국가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반감도 컸던 거죠."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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