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혁명 특징은 주체성·저항성·지속성
목적지 도달하지 않으면 정지하지 않아

▲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고, 1923년 1월에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여기에서 그는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된다"고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라는 특징을 지녔음도 확인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마치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민주항쟁을 바로 경험한 듯이, 민중의 주체성, 저항성, 지속성을 특징으로 나열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에 시위 진압을 하는 계엄군과 경찰은 "전문대학 이상은 자숙 상태로 판단되나, 고교생은 징후가 있다"고 2022년 부마항쟁진상규명위가 발간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 보고서>는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대생이 자숙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경남공업전문대(이하 경남공전·경남대 병설) 학생 6명이 군사재판 및 즉결에 회부되었다. 당시에 경남공전은 재학생 연령차가 심했고, 2년제 단기교육기관으로 중견기술자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2학년 2학기에는 실습생으로 공장에 출퇴근을 했으며, 또는 직장에 다니면서 학교에 다니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에 구속된 학생의 학부모가 재판부에 보낸 진정서에는 "언제나 온순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학업에 열중하는 아이들"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학생 중 3분의 1 이상은 직업훈련을 받고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일반대학 입시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문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군사재판을 받은 경남공전생에는 부산·강원도·서울에서 온 하숙생이 포함되어 있다. 경남대 남문 길 건너편 하숙집(현재 해운초등학교 뒤편)에서 중간고사 시험 공부하던 5명의 하숙생은 밤에 바람 쐬러 잠시 나갔다가 시위에 참여하였고, 창동에서 당구를 치다가 주인이 시위 때문에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하여 시위에 참여하고, 남성동파출소 인근에서 술을 마시다 시위에 참여하여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신채호 선생이 말하는 의분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인구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 마산 인구는 약 38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적어도 13만 명 정도는 1970년대 마산의 공업화 과정에서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마산은 집에서 떠나온 이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경남공전 졸업생 절반 이상은 지역에서 취업을 하였고, 대부분 지역 공장에서 생산직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의식을 표출하며,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군이 되었다. 부마항쟁에서 시작된 시민 참여는 이후 1980년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민주 대항쟁의 역사적 선례를 만들어 내었다. 이제 우리는 학생이나 지식인이 시위를 선도하는 사회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거리낌 없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행동에 나서는 사회가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101년 전에 말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정지하지 않는"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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