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동서남북 나타낸 오방색 각 황룡·주작·현무·청룡·백호
고구려 벽화서도 색동치마 발견 예부터 왕실·백성 다 즐겨 입어
겨레의 고유한 색채로 자리 잡아

색상을 철학과 연결하는 게 무리인 듯해도 그렇지 않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색상을 통해 신앙을 드러내기도 하고 일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특히 여러 색깔 중에서도 노랑·빨강·검은색·파란색·흰색, 이 다섯 색은 오방색이라 하여 우리의 관습에도 깊숙이 배어있다.

지금은 코로나19 재확산 상황이라 전시가 미뤄졌지만 창원역사민속관은 지난 1일부터 '색동 아이옷과 장신구전'을 기획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2단계가 해제되면 그때부터 12월 13일까지 문을 연다고 하니 어떤 색동옷이 있는지, 그리고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장신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 동물을 수놓은 색동 소매./정현수 기자
▲ 동물을 수놓은 색동 소매./정현수 기자

◇색동옷 누가 언제 입었을까 = <중종실록>에 실린 옛이야기 하나 먼저 꺼내본다. '어부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 이야기다. 그가 일흔 살이 되던 해 설날에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잔치를 벌였다. 허연 수염이 무성한 노인이 꼬까옷, 때때옷을 입고 마당에서 춤을 추고 노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2세, 3세 후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이런 파격마저 마다치 않았기에 이현보는 죽어서도 효절공(孝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이야기에서 색동옷은 나이가 들어서 입는 것은 아님을 유추할 수 있겠다. 예부터 색동옷은 귀족 서민 할 것 없이 돌잔치 혹은 어린 나이, 6~7세 정도까지 설빔으로 많이 입었다. 섣달그믐날인 까치설날에 많이 입는다 해서 까치저고리, 까치두루마기 같은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색동옷은 조선 때 왕실에서도 입었다. <일성록>이라는 문헌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정조 7년 계묘(1783)년 9월 7일 있었던 기록이다. "오늘은 바로 나의 원자가 첫 생일을 맞는 날이다. 하늘과 조종이 음으로 돌보아 주시어 원자가 색동옷(衣彩)을 입고 노리개를 가지고 놀면서 우리 자전과 자궁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니…."

이렇게 돌날에 색동옷을 입히는 것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결혼식 때에도 이 색동옷을 입는다. 신부는 혼례복으로 활옷과 원삼을 입는데 이 옷들의 소매에도 색동을 넣어 만듦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색동옷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 우리 겨레는 아주 오래전부터 색동옷을 입었던 것 같다. 고구려 때 무덤인 수산리 고분벽화에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여성 그림이 그걸 증명한다. 벽화 속 색동치마를 입은 여인은 뒤따르는 시종이 양산을 씌워주는 것으로 보아 귀족인 모양이다. 수산리는 북한 땅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마을이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도 주름 잡힌 색동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러한 그림은 고구려 벽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카마스 고분벽화에도 나타난다.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중가족(포의족) 여인의 치마도 비슷하다고 하니 색동주름치마는 옛날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입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겠다.

▲ 색동 수나비노리개. /창원역사민속관
▲ 색동 수나비노리개. /창원역사민속관
▲ 오방장 두루주머니. /창원역사민속관
▲ 오방장 두루주머니. /창원역사민속관

◇왜 돌날 입는 옷을 색동으로 꾸몄을까 = 지금까지 '색동'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이게 어떻게 생겨난 말인지 궁금하다. 색동에서 '색'은 한자로 '色', '동'은 순수한 우리말로 저고리 소매에 이어 대는 동강의 조각을 말한다. 색동이란 오색 천 조각을 잇대어 만든 소맷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색동 색은 오방색을 기본으로 한다. 글머리에서 언급했듯이 '황·적·흑·청·백' 이렇게 다섯 색깔인데, 이는 방향을 가리키는 색이기도 하다. 황은 중앙이요, 그래서 옛날 중국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불렀다. 동물은 용을 이르므로 '황룡'이라 했다. 붉은색은 남쪽을 가리킨다. 동물은 봉황을 가리키므로 '주작'이라 하였다. 검정은 북쪽, 그래서 검은 거북을 가리키는 현무다. 푸른색은 동쪽인데 동쪽에도 용이 있어 '청룡'이다. 흰색을 의미하는 서쪽은 호랑이를 상징해서 '백호'다.

경남의 대표적인 전통연희 '오광대'에는 '오방신장과장'이 있다. 그것도 제1과장으로 배치된 이유는 벽사진경, 사악함을 쫓아내고 경사를 맞이하고자 하는 제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돌옷, 즉 돌복은 태어나서 1년째 되는 날에 입는 옷이다. 옛날에는 태어나서 100일 안에 사망하는 경우가 잦았다. 백일도 기념하지만, 첫 돌은 성장 초기 단계에서 한고비를 넘겼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나쁜 기운을 막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깃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때 무용수들이 입는 무복은 복을 기원하고 액을 쫓는 의미로 색동옷을 입었으며 오방색동은 각종 장신구와 일상 생활용품에도 두루 사용되었다.

그래서 색동은 한국인의 삶이 융화된 고유한 미의식을 담고 있으며 사계절을 가진 한국의 자연 색채와 어우러진 색채 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 남자아이 돌복(색동저고리, 마고자, 풍차바지). /창원역사민속관
▲ 남자아이 돌복(색동저고리, 마고자, 풍차바지). /창원역사민속관
▲ 여자아이 돌복(색동저고리, 조끼, 치마). /창원역사민속관
▲ 여자아이 돌복(색동저고리, 조끼, 치마). /창원역사민속관
▲ 남자아이 색동 오방장 두루마기./창원역사민속관
▲ 남자아이 색동 오방장 두루마기./창원역사민속관

◇아이들의 색동옷 =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옅은 색 풍차바지에 옥색과 분홍색 색동저고리를 입고 붉은색 돌띠를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남색 전복과 연두색 몸판에 색동 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고 색동 소매가 달린 오방장두루마기를 입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은 분홍색 속바지에 노란색 속치마를 입고 그 위에 다홍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노란색이나 연두색 몸판에 색동 소매를 달았고 여기에 당의를 덧입기도 했다. 머리에는 굴레를 쓰거나 뱃씨(머리장식품)댕기나 제비부리댕기를 달았다. 여자아이도 오방장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옆선과 소매를 붉은색이나 자주색으로 장식해 남자아이 것과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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