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에 끝이 났다. 7년 동안 전면전이 계속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적군이든 아군이든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1592년 4월 부산포 상륙을 시작으로 맹공을 펼쳤던 왜적이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대패하면서 국면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왜군은 뒤이어 4월 18일 수도 서울에서 자진해 철수했고 명나라 군대는 싸울 생각을 거두고 물러났다. 한 해 전 6월, 평양이 점령당한 뒤 시작된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은 이때부터 본격 진행됐다.

그렇다고 왜적이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남쪽 경상도로 내려와 해안에 왜성을 쌓고 눌러앉았다. 소강 상태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보면 맞지만 경상도는 예외였다. 경상도에 머무는 왜적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났다. 오히려 경상우도의 조선 군사와 백성들은 일상적인 긴장감이 높아졌다. 1593년 6월 벌어진 진주성 2차전투에서 알 수 있듯 왜적들은 전쟁 수행에 필수품인 곡식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를 끊임없이 노렸다.

이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주성 2차전투를 전후해 진주 가는 길목인 정암진을 지켰다는 정도로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장군은 전투만 수행했던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에서 산성을 수리하고 새로 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면 돌아오는 빛나는 공은 아니었지만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 창녕 화왕산성 동문 일대 성곽과 억새가 우거진 평원.
▲ 창녕 화왕산성 동문 일대 성곽과 억새가 우거진 평원.

평지 읍성 조총방어에 불리
장군, 산성 수리·축조 맡아

◇읍성이 아니고 산성인 이유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방어 정책은 산에 있는 산성이 아니라 평지에 쌓은 읍성이 중심이었다. 산성은 태종 시절 창녕 화왕산성과 안의 황석산성 등을 고쳐 쌓은 적이 있을 뿐(<태종실록> 1410. 2. 29.) 그 뒤로는 팽개쳐져 있었다. 세종과 명종이 1439년과 1510년에 쌓거나 수리한 것도 평지에 있는 읍성이었다.

임진왜란이 코앞에 닥친 1591년에 수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는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좌우병영(울산·창원)이었는데 넓고 크게 해서 사람을 많이 받아들이는 데 힘써서 험준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에 자리 잡았다."(<선조수정실록> 7. 1.)

그러나 임진왜란을 맞아 평지 읍성은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읍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것은 모두 조선 군대였다. 동래성과 부산진성이 그랬고 김해읍성도 마찬가지였다. 왜적이 공격했는데도 유일하게 함락하지 못한 데가 진주성이었으나 1593년 6월 2차전투에서 그마저 깨졌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곽재우 장군이 읍성이 아니라 산성을 손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읍성의 효능이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왜적의 새로운 주력 병기 조총 때문이었다. <만기요람>의 '유성룡 산성론'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왜적들은 성을 포위하면 먼저 성첩의 높낮이와 참호의 깊고 얕음을 둘러보고 수천 조총을 마구 쏜다. 성 안에서 지키는 병졸은 쥐처럼 엎드려 기어다니느라 고개도 못든다. 다른 왜적들이 곧장 진격해 나무·돌·짚단 따위를 마구 집어던져 참호를 메운다. 높이가 성과 같게 되면 순식간에 성이 함락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군사들이 공포에 질리는 경우도 많았다. 진주성 2차전투 당시 왜군의 진격로였던 함안에는 조선군 수만 명이 먼저 집결(<난중잡록> 1593. 5.)해 있었지만 저절로 무너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적군의 화포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매우 어수선하고 두려워하며 다투어 성 밖으로 나가다 조교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징비록>) 주력 무기가 달라지면서 읍성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낙동강 일대 산성 수축을 담당

"경상우도를 보전하지 못하면 호남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우도의 산성은 험한 데 있어서 지킬 수 있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의령 조흘산성은 매우 험하니 의지할 만합니다. 곽재우가 이빈(경상도 순변사)에게 여러 번 말했다고 하니 이제 재우에게 모두 맡겨 지키게 하소서. 삼가도 산성이 있는데 모두 지킬 만합니다." 영의정 유성룡이 1593년 12월 19일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다.

당시 장군은 성주목사와 경상우도 조방장을 겸하면서 정암진 방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령과 삼가의 산성 수축까지 떠맡게 됐다. "곽재우가 삼가·의령만이 아니라 단성·고령과 낙동강 일대까지 한결같이 조치하게 하소서." 이틀 뒤에는 비변사까지 나서서 더 많은 지역을 관장하도록 했다.

도원수 권율을 통해 임금의 명령을 받은 장군은 현장을 조사해 곧바로 보고했다. <망우선생문집>의 '도원수에게 산성 쌓기를 품신하는 장계'(1594. 1.)를 보면 먼저 수축할 필요가 없는 산성과 수축해야 하는 산성을 구분한 다음 인력을 조달하는 방법까지 사례별로 구체적으로 나온다.

의령·단성은 성안에 샘물이 없으니 수축하지 말아야 하며 삼가 악견산성과 지리산 귀성·철성산성, 가야산 용기산성은 샘물이 있고 험준해서 수축할 만하다고 밝혔다. 인력 충원 방안은 제각각 경우에 따라 다르게 제시했다. 삼가는 백성이 없으니 군진에 있지만 싸울 용기는 없는 병사를 동원하고, 귀성·철성은 명망이 있는 산성장을 임명해 산성의병 이름으로 군적에서 빠졌거나 달아난 사람을 모집하게 하며,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용기산성은 승의병 가운데 용기없는 승군이나 관아·사찰에 남은 스님을 모으는 방안이었다.

도원수의 결재를 받아 장군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승의병을 동원하는 문제였는데 지휘체계가 달랐기 때문이지 싶다. 이는 비변사가 임금에게 윤허를 받는 절차를 거쳐 마무리됐다. "곽재우가 '총섭장 유정에게 스님들을 모아 수축하게 하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악견과 이숭(합천) 두 산성은 전적으로 유정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선조실록> 1594. 2. 27.)

 

정암진 전투 매복작전 경험
산성 필요성 주장 핵심근거

◇일찍부터 산성 활용해 정탐·매복

장군은 초기 의병활동에서부터 산성의 중요성을 알고 일찍부터 활용하고 있었다. 의령 남쪽 남강변과 동쪽 낙동강변을 따라 늘어선 산줄기에 의지해 망을 보고 매복도 했다. "장군은 진을 치고 있는 데서 왜적이 다니는 길까지 2~3식정(1식정=30리)에 잇달아 척후를 두고 평안한지 여부를 몰래 보고하도록 했다. … 또 정예를 선별해 요해처에 잠복하고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오는 족족 사살했다."(<난중잡록> 1592. 4. 22.)

의령에서 남강변은 정암진이 있었던 정암마을에서 지정면 성산마을까지이고 낙동강변은 같은 성산마을에서 낙서면 아근마을까지다. 야트막한데도 산성 흔적이 남아 있는 데가 여럿이다. 강변과 들판이 한눈에 장악되는 데다 위에서 아래로 화살이나 돌멩이를 날리기 좋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낙동강변 백산마을 뒷산에는 유곡산성이 있고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성산마을은 뒷산 이름이 산성재이며 남강변 죽전리에는 호미산성이 남아 있다.

누가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군사 활동을 벌일 때 이들 산성을 고쳐 쌓고 활용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장군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의령에 머물고 있던 경상도 순변사 이빈에게 의령 조흘산성에 대해 여러 차례 말할 수 있었다.

장군은 이후 진주목사로 옮겨지고서도 산성 수축 업무는 그대로였다. 비변사가 "삼가현 산성 일도 이전처럼 주관하게 하고 그대로 조방장을 겸해 우도의 군무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선조실록> 1594. 12. 29.)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아낸 날이 바로 이튿날이었다.

1595년 벼슬을 그만뒀다가 1597년 정유재란을 앞두고 경상좌도 방어사를 맡아 돌아왔을 때도 장군에게는 현풍 석문산성 신축 업무가 주어졌다. 앞서 산성 수축에서 잘못이 있었다면 같은 일을 되풀이해서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 <1872년 지방지도>에 나오는 창녕 화왕산성(부분). 화왕산성의 험준함을 과장된 수법으로 표현했다. 동문(아래)·서문과 한가운데 3개 있는 못(용담)을 나타냈다.
▲ <1872년 지방지도>에 나오는 창녕 화왕산성(부분). 화왕산성의 험준함을 과장된 수법으로 표현했다. 동문(아래)·서문과 한가운데 3개 있는 못(용담)을 나타냈다.

장군, 화왕산성서 필사항전
왜, 험한 산세에 결국 퇴각

◇마지막은 화왕산성 수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산성과 관련된 장군의 마지막 활동은 창녕 화왕산성 수성전이었다. 1597년 7월 수축을 맡고 있던 석문산성이 완성되기 전에 왜적이 대거 쳐들어왔다. 그래서 밀양·영산·창녕·현풍 네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옮겨가 죽을 각오로 지켰다. 당시 적장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었는데 왜적들은 산 아래에서 형세가 벼랑처럼 험준하고 성 안 사람들이 조용하고 편안해서 동요되지 않는 것을 올려다보고는 공격하지 않고 하루 밤낮 만에 돌아갔다.(<징비록>)

당시 산성을 지킨 장수가 장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대구 공산산성을, 진주목사(나정언) 등은 정개산성(진주)을, 조방장 김해부사 백사림 등은 안의 황석산성을, 우병사(김응서)는 악견산성을 지켰다. 하지만 끝까지 온전했던 것은 장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진주목사는 8월 4일 정개산성을 버렸으며 우병사는 같은 날 들판에서 싸우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악견산성을 버렸다. 김해부사가 줄을 타고 황석산성 밖으로 내려간 16일은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 등 백성과 병사 500명 남짓이 전사한 날이기도 했다. 또 체찰사와 도원수에게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오라는 어명이 9일 내려졌으나 군사는 이미 흩어져서 없어진 뒤였다.(<난중잡록>·<기언>)

화왕산성에서 아무 소득 없이 물러난 가등청정 군대는 잔인했다. 먼저 황석산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초계·합천·삼가·산청·안의를 거쳤는데 지나간 여러 고을은 흉년으로 메말라버린 땅처럼 남아난 것이 없었다. 황석산성을 깨고 나서 전라도 운봉에서 장수로 가는 길에 남원을 지날 때는 근처 산을 작정하고 크게 수색해 부지기수로 숨어 있던 조선 백성들을 하나 남김없이 쓸어없애 버렸다.(<난중잡록>)

장군은 정유재란 시기 산성 수성전에 성공한 유일한 장수였다. 장군의 화왕산성 수성을 두고 '단순한 피란'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당시 조선군의 전략이 산성 중심이었음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얘기다. 화왕산성을 지켜내는 장면은 겉은 평온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팽팽하게 긴장된 살떨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수성을 못했 으면 밀양·영산·창녕·현풍 백성들도 똑같이 참혹한 꼴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남쪽 사람들은 모두 장군을 두고 장수들 중 으뜸이라 일컬었는데(<선조실록> 1604. 2. 17.)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전란 초기 의령과 정암진을 지키면서 산성을 활용해 작전을 펼쳤던 장군의 경험은 산성의 효용가치와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바탕이 됐다. 싸움보다 안전한 것도 아니고 전공으로 빛나는 것도 아니었던 산성 수축 작업을 장군은 4년 가까이 진행했다. 또 막바지에는 화왕산성 수성에 성공함으로써 일대 백성들의 소중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산성 수축과 수성에 나섰던 장군의 안목과 행보를 되짚어 보면서 망우당이 어째서 오늘날까지 훌륭한 장수로 꼽히는지 그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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