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앞장서 싸워 의병들 신임 얻어
누구든 의견 펼치도록 해 상 주기도
군법도 상하 구분 없이 엄하게 적용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동래성을 깨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기가 살고 있던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함께 싸울 군사를 모았다.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날짜는 4월 22일이다. <선조실록>은 장군이 '가장 먼저 병사를 일으켰다'면서도 날짜는 '4월 24일'(1592년 6월 28일 자)과 '4월 20일 사이'(11월 25일 자)로 다르게 적었다. 그런데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자명소(自明疏=스스로 해명하는 상소문)에서 "만 번이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4월 22일 의병을 모아 일으켜 왜구를 막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어느 날이 맞느냐고 다툴 소지는 크게 없다. 그래서 2010년에는 정부가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불패 신화는 당대에 이미

장군의 군대는 왜적을 맞아 싸우면서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다. 이는 당대에도 이미 잘 알려진 일이었다.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은 그해 6월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싸우면 반드시 승리했다"(<학봉집>)고 조정에 보고했다. 또 창성부원군 김석주(1634~84)는 "적은 군사를 이끌고 굳센 적군에 맞서 크고 작은 수십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식암유고>)고 적었다.

한 번도 지지 않고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임진왜란에서 이런 공적을 이룩한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빼고 나면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유일하다. 그나마 충무공이 거느린 병사는 훈련을 받은 관군이었지만 망우당의 의병은 사실상 오합지졸이었다. 군사가 많기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숫자는 왜적이 언제나 많고 의병은 적었다.

곽재우 장군은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군대가 될 수 있었을까? 첫째는 유리한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다. 장군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각각 동쪽과 남쪽을 막아주는 형세였다. 게다가 강변에 개활지가 넓게 펼쳐지는 맞은편 함안과는 달리 깎아지른 산비탈이 강가에 늘어서 있어서 방어와 반격이 한결 손쉬운 조건이었다.

둘째는 장군의 신출귀몰한 작전이 더해졌다. 왜적이 함부로 나대지 못하도록 의병(疑兵) 전술을 쓰고 한 사람이 횃불을 다섯 개 들게 하는 등 적은 군사를 부풀리는 허장성세를 했으며 언제나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유인·매복·기습을 중시하는 유격전을 주로 채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불패신화를 설명하기가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런 조건을 갖추어도 정작 일선 전투 병사들이 흐물흐물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질 수밖에 없다. 장군이 손아래 병사들의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아 '원팀'을 만들고 정예로 거듭나게 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의령 들머리 정암진 가까운 남강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모습대로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탄 차림인데 눈에 잘 띄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의령 들머리 정암진 가까운 남강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모습대로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탄 차림인데 눈에 잘 띄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김훤주 기자

◇스스로 남보다 먼저 나섰다

초유사 김성일은 조정 보고에서 전쟁 초기 장군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왜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격하였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아주 재빨리 오갔기 때문에 적들이 철환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다."(<학봉집>)

당시 의병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백성이거나 아니면 이미 왜적에게 당한 적이 있는 패배한 장수 또는 꺾인 병졸로 구성된 약한 군대였다. 그러니 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곽재우 장군이 왜적보다 먼저 물리쳐야 했던 것은 이 같은 두려움이었다. 장군이 앞장서서 내달린 데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허목(1595~1682)은 망우당곽공신도비명(<망우선생문집>에서는 '묘지명')에서 이런 사정을 두고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향병(鄕兵)으로 모두 오합지졸이어서 전투에 익숙하지 않고 또 공격하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사졸들보다 앞장서 나갔다"(<기언>)고 했다.

자기보다 앞장서 싸우는 장군에 대해 병사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짐작하는 그대로였다. 김성일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일당백이 되었다"고 했으며 허목 또한 "군사들 마음이 분발하여 모두 다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니 열 번 싸우면 열 번을 이겼다"고 적었다.

◇누구보다 병사를 아꼈다

장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장군은 잘 알았기에 병사들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아꼈다. 정유재란 당시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던 배대유(1563~1632)는 조정의 명령으로 지은 '곽재우전'에서 "사졸들 어루만지기를 집안 식구들처럼 하여 가장 아래 병졸이라도 정성을 다하였다"고 했다.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던 모양인지 1595년 12월 5일 자 <선조실록>에서 병조판서 이덕형은 "곽재우는 사졸을 사랑합니다" 하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광해군일기(중초본)> 1608년 8월 13일 자에서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올린 짧은 상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윤근수는 당대에 하나뿐인 명장이 바로 곽재우라면서 병사들의 반응을 보고했다. "모든 군졸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여 주므로 군졸들끼리 '집을 나왔다뿐이지, 군대에 있다 해도 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합니다."

뿐만 아니었다. 윤근수의 앞선 상소는 이렇게 이어진다. "적과 싸우다 휘하가 몰리게 되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출한 다음 자신이 뒤를 막아 주었습니다. 때문에 사졸들 모두 그에게 쓰이기를 좋아하며 믿어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권유(1633~1704)는 "패배한 장수도 장군 밑에서는 생각을 고쳐 용감해졌고 흩어진 병졸들도 장군에게 돌아오면 다시 정예가 되었다. 때문에 병사는 비록 적었지만 승리할 기회가 많았다"고 장군의 신도비명에 적을 수 있었다.

나아가 장군은 병사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챙겼다. 김성일은 그해 6월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아내와 자식의 의복조차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주었으므로 가업이 탕진되어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끝내 떠나가지 않는 병사를 얻을 수 있었다.

◇병사를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았다

장군에 대한 이런 기록들은 이어진다. <승정원일기> 1638년 3월 9일 자를 보면 행부사과 최유연(1587~?)이 신하들을 많이 만나 다양하게 듣고 널리 받아들이라고 인조에게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조가 군대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물었을 때 곽재우 장군이 이렇게 대답하더라며 본보기로 꼽았다. "매번 군중에 명령하여 귀천을 불문하고 각자 의견을 펼치게 하여 뛰어난 계책이면 채용합니다. 작고 볼품없는 하졸도 때때로 장교들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상을 주고 계책을 채용하니 사람마다 즐거워하였습니다."

장군은 그냥 겉보기로만 병졸을 아낀 것이 아니었다. 병사를 아끼고 존중하면 거기에서 상대방을 이길 좋은 방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처럼 귀하고 천한 구분 없이 보잘것없는 조그만 병사조차 저마다 생각을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렇게 존중하면서도 군법은 엄격하게 하였다. 가깝다고 해도 봐주거나 하지 않고 상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하였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곽재우는 군법이 엄명합니다"(<선조실록> 1595년 12월 5일 자)고도 아뢰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식암유고>에서 김석주는 장군이 화왕산성을 지킬 때 "동생 곽재지의 하인이 부대를 벗어나자 목을 베었으며, 족친 서얼(族孼) 윤생도 명령을 위반하자 곧바로 목베었다"고 적었다.

▲ 현고수. 북을 매달았던 나무라는 뜻이다. 장군이 태어나서 자란 의령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부대의 본부가 있었던 마을이다.
▲ 현고수. 북을 매달았던 나무라는 뜻이다. 장군이 태어나서 자란 의령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부대의 본부가 있었던 마을이다. /김훤주 기자

◇조정의 평가는 어땠을까

당시 의병장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인물은 의령 출신 홍의장군 곽재우와 광주 출신 익호장군 김덕령 둘이었다. <선조실록> 1595년 12월 28일 자에는 좌찬성 윤근수가 선조에게 두 장군에 대해 아뢰는 내용이 있다. 김덕령은 "처음에는 볼 만하였으나 혹독하고 형벌이 무거워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하였고 곽재우는 "적을 막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달라 모두 장수 재목으로 인정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1594년 8월 10일 자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누구를 발탁할지 물은 데 대한 신하들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은 "곽재우가 쓸 만하고 사람됨을 보니 믿음직하고 성실합니다" 하였고 김늑은 "인심을 많이 얻었으므로 충분히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했으며 정곤수는 "사람들이 모두 병마절도사로 삼고자 합니다" 하였다.

◇평소 생각이 민본이었다

부하 병졸을 이처럼 아끼고 존중하며 차별 없이 대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태도나 자세는 하루아침에 결정되지도 않고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임진왜란 전란을 맞아서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다듬은 생각과 공부의 갈래가 이렇게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장군의 평소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상소문이 하나 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608년 11월 15일 자에 있다.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들으며,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밝히고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인심이 떠나버리면 천명은 반드시 가기 마련이고, 인심이 기뻐하면 천명은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천명은 인심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인심을 잃게 되면 임금도 나라도 어찌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일반 국민이 주권자인 지금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지만 임금 한 사람만이 유일한 주권자였던 왕국에서 그것도 임금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군의 이와 같은 평소 소신이 군대의 근본인 병사를 아끼고 존중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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