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조정 올릴 만큼 극상품…동료·친지에 선물도 하고 왜란 땐 병사 식량 대용
수박, 일제강점기 때 유명…함안에 연꽃 없다던 오횡묵 보지 못했을 가능성 높아

함안은 감이 유명하다. 가을이면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겨울이면 깎아 말린 곶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크기도 작지 않고 달콤하기도 처지지 않는다. 여항면과 함안면·가야읍 일대에서 많이 난다.

수박도 이름이 높다. 옛날에는 여름에만 났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겨울에도 쏟아져 나온다. 함안이 전국 생산의 10%를 차지하는데 군북면·법수면과 대산면·가야읍이 주산지다.

연꽃도 손꼽힌다. '옥수홍련'과 '아라홍련'의 본고장이다. 옥수늪에서 자생하던 옥수홍련은 1100년 전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라홍련은 고려시대 연밥이 성산산성 연못에 잠들어 있다가 700년 세월을 건너뛰어 피어났다.

그렇다면 이렇게 풍성한 감과 수박과 연꽃이 오횡묵 시절에는 어땠을까?

◇감은 그때도 함안 곳곳에

<함주지> '토산(土産)' 조항을 보면 감(枾)은 '마을마다 있었다'. 오횡묵이 읽은 <군지>에도 '토산'에 감이 올라 있다. 조정에 바치는 공물(進貢)로도 '조홍(早紅)'과 '건시(乾枾)'를 적었다. 조홍은 추석 전에 일찍 익는 감이고 건시는 곶감이다.

<함안총쇄록>에는 감나무가 심긴 풍경이 곳곳에 나온다. "정면 작은 담장 아래에 대나무가 푸르게 있는 가운데 감나무가 복숭아·모과나무와 백일홍과 함께 서로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1889. 4. 21.) 동헌 마당에 감나무가 서 있는 모습을 오횡묵은 이렇게 적었다.

이틀 뒤 찾아간 향교에서는 어떻게 적었을까? 거기는 감나무가 아예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당의 남쪽(庭之南)에 감나무가 수십 그루 있는데 물으니 이 나무의 과일이 품질이 매우 좋아 성묘(聖廟=대성전)에 새 과일을 올릴 때 쓴다고 한다." 지금도 향교 남쪽 비탈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읍성에도 감나무가 많았다. "여염(閭閻=일반 백성 살림집)이 500호 남짓인데 지붕 모퉁이가 즐비하고 밥짓는 연기가 자욱하다. 감나무가 석류·복숭아·살구·오얏·오동나무 따위와 서로 뒤섞여 있었다."(1889. 4. 27.) 동헌 서쪽 비봉산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지금도 함안향교 바로 남쪽 비탈에는 오횡묵이 본 것처럼 오래된 감나무가 여럿 있다. /김훤주 기자
▲ 지금도 함안향교 바로 남쪽 비탈에는 오횡묵이 본 것처럼 오래된 감나무가 여럿 있다. /김훤주 기자

◇아래로 베풀고 위로 바치고

오횡묵은 '조홍시는 이 땅의 제철 음식(時食)'(1892. 7. 13.)이라며 동료·친지들에게 선물했다. 같은 날 "전운사(마산창 으뜸 벼슬아치)에게 다섯 접(帖), 세 위원(三委員)과 주사 정학교(丁主事 鶴喬), 김춘파·김원중·이해승·김정구와 기생 금향(錦香)에게 한 접씩 보냈다." 또 "위원(委員)·낭청(郎廳) 다섯 동료에게 홍시·준시(枾=꿰지 않고 눌러 말린 감)를 한 접씩 선물로 보냈다."(1892. 12. 8·9.)

통제사에게는 전운사에게 바친 곱절을 올렸다. "조홍 열다섯 접을 양로당(養老堂)에 들여보내고 열 접은 통제사에게 전하여 바치게 했다."(1892. 7. 2.) 양로당은 통제영에 딸린 기관으로 퇴직한 장교·아전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일하는 곳이었다. 아들 학선(學善)이 벼슬살이를 하며 묵는 공간이기도 하였다(1889. 5. 25~26.).

1889년 10월 4일 서울 본가에 있을 때는 함안에서 마부가 모과·홍시·지실(枳實) 등속을 가져오자 임금께 바치려 했다. 하지만 질이 낮아 못 바치게 되자 서운해하는 심정을 적었다. "전궁(殿宮)에 진헌(進獻)하여 보잘것없으나마 정성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오는 길에 많이 부서지고 이지러진데다 품질 또한 처지는 듯하여 바치지 못하여 정말 개탄스럽다."

손아래로도 베풀었다. 1892년 12월 30일 세밑에 "관속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과 여러 일꾼(勤勞人)들에게 저마다 돈냥을 등분에 따라 베풀어주었다." 모두 320냥 남짓이었는데 준시 네 접이 마른 대구(80마리)·아가미젓(76부(部))·고니젓(42부)·인절미(2상자)·담배(2움큼(把)) 등과 함께 나누었다.

▲ 함안읍성 안 민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감나무. 오횡묵 시절에도 대충 이랬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 함안읍성 안 민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감나무. 오횡묵 시절에도 대충 이랬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받을 때는 청렴을 생각하고

베풀고 바치는 데는 거침이 없었지만 받아들일 때는 조심스레 가렸다. "지역 양반 몇몇이 곶감을 주었다. 받을 만하면 받았지만 부잡스럽거나 정당한 명분이 없으면 물리쳤다."(1889. 12. 29.) 오횡묵은 곧바로 아랫사람들에게 넘겼다. "받은 것이 열 접 남짓인데 대구·김(海衣)·문어 등물과 함께 곶감을 공형·장교·통인·관노·사령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시를 지어 마음자리도 나타내보였다. "사양하려면 감정 안 다치게 하고 받으려면 청렴을 돌봐야 하네/ 말과 행동 낱낱이 백성들이 보는데/ 태수가 가벼이 찡그리고 웃는다 말하지 말게/ 어물·과일과 함께 흩어주면 무방하다네."

이재두(李載斗)라는 사람에게서 배·밤·감을 받은 1892년 7월 29일에도 그럴듯한 시를 지었다.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에 더해 홍시의 멋과 맛까지 잘 살려냈다. 지금 시대에 맞추어 현대화하면 함안 홍시·곶감 홍보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배는 희고 감은 붉고 밤은 노랗네/ 꾸러미 열어보니 가을향기가 진동하네/ 꿀보다 달콤하여 아주 입에 맞고/ 얼음보다 상쾌하여 절로 내장이 적셔지네/ 저물녘 먹으며 그냥 하는 흰소리가 아니라네/ 정으로 주는 선물 예사롭지 않음을 알지만/ 관아 정원 늙은 대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없으니/ 구슬 같은 시문으로 갚고 싶은데 빛이 없어 부끄럽소."

◇일제강점기에도 대단했던

함안 감의 명성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였다. <매일신보> 1934년 8월 8일 자 '농촌순례기-경남편(38) 함안 巴水里(파수리)의 矯風(교풍)'에 나와 있다. 제목에 벌써 곶감이 나온다. '乾枾(건시)로 年産萬圓(연산 만원) 衣服次(의복차)는 手織自給(수직자급) 가마니짜는 것은 負債償還(부채상환)에'.

"古記(고기)에도 함안의 특산으로 감이 쓰여 있고 또 300년 전 임진란 때에도 常勝將(상승장)으로 자처하는 권율이나 명장 곽재우의 '敵勢(적세)가 성대하고 우리 군사는 오합(烏合)이며 前途(전도)에 양식도 없으니 輕進(경진)치 말으시오' 하는 충고를 듣지 않고 팔을 뽐내며 함안으로 몰려왔다가 양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익지도 않은 시퍼런 감을 따먹으며 연명하였다. 그 때 기록을 그대로 적으면 '慄遂過江(율수과강) 進至咸安(진지함안) 城空無所得(공성무소득) 諸軍乏貧(제군핍빈) 摘靑枾實以食(적청시실이식) 無復鬪心矣(무복투심의)'라 한 것으로 보아 군량 없을 때에 군량을 대(代)할 만큼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잘 나는 명산이라도 인위로 가꾸지 않으면 오랜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에 부지 중 쇠퇴하고 마는 것이다. 이 부락에도 약 10년 전에는 쇠퇴가 심하여 昔日(석일)의 形影(형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을 다시 부흥시키어 연전에 枾苗(시묘) 2만 株(주)를 산야나 택지 주위에 식재하야 지금은 매년 1만箱(상)(每箱(매상) 50개)을 산출하는데 1상價(가)가 1원이므로 약 1만원의 대금이 촌으로 들어오니 …재료대 130원과 촌민의 부역으로 지어놓은 마을회관은 …水枾(수시) 건조장이라는 임무 하나를 더 가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곽재우의 충고를 무시하고 함안에 들어왔다가 식량이 없어 대신 시퍼런 감을 따먹었다는 전설이 새롭게 확인된다. 더불어 1920년대 파수에 감 묘목 2만 포기를 심어 30년대에 해마다 곶감 50만 개가 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담겨 있다.

파수마을은 지금도 곶감이 대단하다. 오래된 감나무도 여기저기 많이 있다. 파수농공단지가 끝나는 즈음 상파 들머리 길가에 서 있는 '함안곶감 시조목'이 대표적이다. 2015년 세운 표지판에 나이가 '230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적혀 있다.

◇함안 수박의 명성은?

반면 함안수박의 명성은 <함안총쇄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1892년 윤6월 12일 한창 가물 때였다. 여섯 번째 기우제를 벽사강(碧寺江)에 지낸 다음 와룡정에서 잠깐 쉴 때였다. "본면(本面) 집강이 갑자기 와서 수박(水朴)을 바쳤다. 빨아먹으니 더위 먹은 것이 가셨는데 장맛비보다 나았다."

여기 '본면'이 당시는 산족면(山足面)이었고 지금은 군북면이 되었다. 와룡정은 군북면 월촌마을에 있다. 이로써 월촌마을 일대 남강변에서 130년 전에 이미 수박 농사를 하고 있었음은 분명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함안수박도 이름이 높았다. <매일신보> 1931년 7월 31일 자 '함안 서과(西瓜) 출하-부산에만 2000개' 기사가 대표적이다. 서과는 수박을 이른다. 그러니 오횡묵이 적지 않았을 뿐 실은 예전부터 함안 명산일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경남에서 제일로 聲高(성고)한 함안생 서과는 …품종은 大和(대화)砂糖(사탕)의 2종이라는데 적기에 채취할 時(시)는 果汁多(과즙다) 甘味强(감미강) 品質(품질) 極上(극상)이라 하야 …부산역전 농산품공동판매소의 手(수)에 依(의)하야 공동판매를 行(행)키로 되야 初出荷(초출하) 2000개가 21일 夜(야) 부산 도착…".

같은 <매일신보> 1935년 8월 7일 자 기사 '경남의 농작물 天候(천후) 순조로 풍작-田作物(전작물)은 市勢(시세)도 앙등'에서도 함안수박은 명산이었다. "명산의 하나인 함안서과 울산참외 김해 진영 동래 지방의 야채류 시세가 앙등하야 농촌에는 의외의 호황으로 활기를 呈(정)하고 있다."

◇함안에 연꽃이 없다고 했으나

오횡묵은 연꽃을 매우 좋아하였다. 1892년 7월 15일 역병이 돌지 않도록 비는 여제(려祭)를 지냈다. 불교에서도 좋게 여기는 백종이 이날인데 마침 연꽃이 얻어걸렸다. 한 줄기(一莖)뿐이었는데도 감흥이 넘쳤다.

"연은 내가 본래 아주 사랑하는데 또 이날이 마침 백종날이라 불가의 명절이다. 길일에 마음으로 사랑하는 물건을 얻었으니 어찌 내가 태운(泰運)을 만날 조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유리병에 꽂아 안석(安席) 위에 두었다. 아침에 벌어지고 저녁에 합해지니 맑고 깨끗한 용태를 잃지 않아 더욱 사랑스럽다."

살인사건 처리로 서두르는 길에서도 연꽃에 정신을 놓았다. 1892년 8월 14일 겸관을 맡은 밀양에서 옥사가 터졌다. '지난달 말에 창원 등짐장수(負商) 한 명이 밀양 장터에서 흥정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딪혀 죽었다'는 것이다. 곧장 창원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편 밀양 수산 국농소(國農所)에 들었다. 수산에는 삼한시대 유적인 수산제(守山堤)가 있고 국농소는 조정이 황무지 개간 사업을 벌이던 장소다.

"들판 연못 세 곳이 커서 둘레가 수십 리가 되는데 연꽃이 널리 퍼져 있었다. 본래 연꽃을 사랑하여 올봄에 옮겨 심으려 했으나 하지 못하여 마음에 늘 한이 되었다. 우연히 와서 장관을 보니 또한 기이한 인연이다.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여 수레를 멈추고 머뭇거리는데 마부가 날이 저물었다고 일러 바로 떠났다."

옮겨 심지 못한 연꽃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횡묵은 1892년 2월 27일부터 3월 26일까지 꼬박 한 달을 울산 나들이로 보냈다. 조세를 잘 걷는다고 소문이 나서 밀린 조세가 많은 울산으로 마산창 전운사가 오횡묵을 보낸 참이었다.

"내가 본래 성품이 연꽃을 사랑하는데 함안에는 없다. 이번 걸음에 거처하는 정원 연못(園池)에서 보게 되었다. 돌아갈 때 캐어가서 지극한 방법으로 길러 올해 안에 꽃을 보겠노라 기약했다."(1892. 3. 20.)

오횡묵은 '함안에는 연꽃이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함안연꽃테마파크의 함안 토종 옥수홍련이 이를 증명한다. 민가나 관아의 연못에는 없었어도 인적이 닿지 않는 야생에는 있었다. 다만 오횡묵이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 함안 자생 토종 아라홍련으로 가득한 함안연꽃테마파크. 그렇지만 오횡묵은 함안에 연꽃이 없다고 했다. 아마 있었지만 못 봤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 함안 자생 토종 아라홍련으로 가득한 함안연꽃테마파크. 그렇지만 오횡묵은 함안에 연꽃이 없다고 했다. 아마 있었지만 못 봤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네 가지 서양 채소도 기르고

서양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덕분에 함안은 1890년대에 이미 외래 나물을 받아들인 고장이 되었다. "홍근대(紅芹薹)·탄입후(綻入喉)·가배지(加排地)·향길경(香桔梗) 네 종류는 서양의 품질 좋은 나물인데 올봄 서울서 얻었다. 오는 춘분·청명에 관아정원에 나누어 심어 여름이 가을로 바뀔 즈음 국을 끓이고 김치를 담거나 생채를 하면 맛이 매우 좋을 것이다."(1892. 7. 18.)

홍근대와 가배지는 무엇인지 짐작이 된다. 홍근대는 지금 '적(赤)근대'라 하는 채소일 것 같다. '홍'이나 '적'이나 붉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가배지는 양배추임이 분명하다. 양배추의 '캐비지(cabbage)'에서 가져온 소리가 가배지인 것이다. 향길경은 향도라지나 서양 도라지 정도로나마 짐작이 되지만 탄입후는 아예 알 길이 없었다.

쓰임새는 가배지가 으뜸, 향길경이 버금, 홍근대·탄입후는 끝자리로 꼽혔다. "홍근대와 탄입후는 국·김치·생채로 쓰이는 데 그친다." 향길경은 이에 더하여 "서양 사람들이 인삼(仁蔘) 대신 먹는다." 가배지는 또 "오직 잎으로 국·김치를 당연히 할 수 있고 안주를 도와 생으로 먹어도 되며 바라보는 아름다움까지 있다."

가배지는 실제 관상용 화초 노릇을 하였다. "가배지 두 포기를 낮은 잎을 잘라내고 화분 위(盆上)에 옮겨 놓고 걸상에서 마주 보니 잎은 깃발처럼 말려 있고 줄기는 장대처럼 곧다. 빛나게 나타나고 우뚝하게 솟았는데 겨울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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